선제적 무력도발(우리 군·軍이 이 옵션을 사용할 리가 없지만)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온 것이 이른바 ‘대북(對北) 심리전’입니다. 3대 세습을 넘어 김씨 왕조의 영구집권을 꿈꾸는 체제의 특성 탓에 전근대적인 수단으로 보이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나 전단지(이하 삐라로 표현) 살포를 심대한 위협으로 보는 것이죠. 북한이 보유한 최대의 대남 비대칭 전력이 핵과 탄도미사일이라면, 우리가 갖고 있는 비대칭 수단 중 하나가 심리전이라고 보는 전문가도 많습니다. 이미 체제경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무의미한 상황이지만 말입니다.
스스로 대남사업총괄 이라고 커밍아웃 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의 ‘격정담화’로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 삐라살포입니다. 탈북자들을 ‘똥개’ ‘쓰레기’로 비하하고 △개성공단철거 △남북공동연락사무소폐쇄 △남북군사합의서파기를 운운하고 나섰는데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삐라살포에 대한 문제제기는 남북군사실무회담 정도에서 김여정 보다 한참 급이 낮은 영관급 정도의 실무자가 푸념식으로 해오던 것입니다. 남북대화가 활발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판문점 실무회담 등에 가면 늘 해오던 북측의 단골메뉴였죠. 그러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을 거치고 남북관계가 험악해 지면서는 북한의 위협도 단계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면서 부터는 아예 삐라살포의 주 무대인 임진각을 군사적으로 타격하겠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기 시작합니다. 2012년 10월 북한 인민군 서부전선사령부는 삐라살포를 ‘용납할 수 없는 전쟁도발’로 규정한 뒤 “사소한 삐라살포 움직임이라도 포착되면 즉시 경고 없는 무자비한 군사적 타격이 실행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편집자 주=당시 우리 군은 “북한이 실제 그렇게 한다면 북한의 원점지역을 완전히 격멸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습니다.)
삐라살포가 우리 정부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로 탈북자단체 등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역시 민간의 삐라살포를 썩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제어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도 ‘팩트’죠. 하지만 북한은 삐라살포가 정부의 배후조종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북한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수도 있습니다.
삐라살포 외에도 북한을 자극하는 심리전이 확성기 방송입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판문점 남북고위급 협상의 막전막후는 김정은 체제가 얼마나 확성기를 두려워하는 지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김관진 대통령안보실장. 홍용표 통일부장관과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간에 이뤄진 ‘무박 4일’ 협상의 최대현안은 확성기 방송 중단이었습니다. 군사 실무회담의 감초에 불과했던 확성기 문제가 당시 북한 군부최고실력자와 대남총책이 생사를 걸고 매달린 현안이 된 것은 우리정부에 심리전의 위력을 확인시켜 준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협상 중에 황병서와 김양건은 평양에 가 김정은의 훈령을 직접 확인하고 왔습니다. 당시 회담내용을 잘 아는 관계자는 “북한 대표들이 ‘확성기 중단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그냥 돌아갈 수 없다’며 초조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북한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대북심리전을 수단을 알아서 포기하겠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확성기 방송이야 2015년 남북합의로 중단을 선언한 것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민간차원에서 이뤄지는 전단살포를 아예 법으로 만들어 금지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은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특히 북한정권 2인자로 불리는 ‘백두공주’ 김여정의 담화발표 4시간여가 지난 시점에 통일부가 대변인 명의로 ‘대북전단금지법’ 추진을 기정사실화 한 것은 향후 남북관계의 역사에 오래 기억될 장면으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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