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착용한 북한 학생들이 6일 평양 청년공원 야외극장에서 한국 정부와 탈북자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등을 규탄하는 대규모 항의 군중집회를 열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천추에 용납 못 할 죄악을 저지른 괴뢰패당을 죽탕쳐버리자’ 등 격렬한 구호들도 등장했다. 평양=AP·뉴시스
북한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사진)의 역할을 ‘대남사업 총괄’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힌 이후 김여정이 진두지휘하는 대남 강경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다. 확고부동한 북한 2인자로 입지를 굳힌 김여정이 4일 탈북자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비난한 담화를 시작으로 나흘째 대남 비방전이 이어지고 있는 것. 특히 김여정이 남북관계 단절 위협과 함께 접경지 도발 가능성을 시사하고 나선 만큼 미국 대선을 앞두고 남북관계가 다시 격랑에 휩싸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 오빠 재떨이 받치던 김여정, 북한 ‘2인자’ 인증
북한 통일전선부 대변인은 5일 담화에서 김여정에 대해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제1부부장”이라며 “김여정 제1부부장이 대남사업 부문에서 담화문에 지적한 내용을 실무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검토사업을 착수하는 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북한이 김 위원장이 아닌 인물이 “지시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특히 통전부는 김여정 지시와 관련해 “개성 북남공동연락사무소부터 결단코 철폐할 것” “접경지역에서 남측이 골머리가 아파할 일판을 벌여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남북연락사무소 폐쇄와 접경지역 도발 예고가 김여정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여정이 대남 공작기구인 통전부와 국무위원회 직속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물론이고 군부에도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지휘봉을 쥐고 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김여정이 사실상 북한 2인자 위상을 굳혔다는 점을 천명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해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열차로 이동한 김 위원장의 담배 재떨이를 들고 서 있는 사진이 찍히는 등 김 위원장 의전 전담으로 각인된 김여정은 지난해 말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에서 당 제1부부장으로, 올 4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복귀한 상황. 김 위원장의 신변이상설이 불거졌을 때는 후계자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6일 평양에서 열린 ‘청년학생 항의군중집회’에선 김여정이 4일 발표한 담화가 낭독됐으며 노동신문은 6, 7일 이틀에 걸쳐 1면을 포함해 각 2개면과 3개면에 김여정의 4일 담화에 대한 각계 반향을 실었다. 북한 공식 선전매체인 노동신문이 북한 최고지도자가 아닌 인물의 담화를 최고지도자의 교시처럼 인용해 반향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 역시 전례 없는 일이다.
○ 비방전 진두지휘하며 한미 동시 겨냥
정부 안팎에선 최근 대남 비난 담화 등을 김여정이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북한이 일제히 비방전에 나선 배경을 분석하고 있다. 김여정이 처음으로 대남 메시지를 내놨던 3월과 이달 4일 담화의 “나쁜 짓 하는 사람보다 부추기는 사람이 더 밉더라” 등의 표현에 기존 북한 담화와 달리 여성적이고 구어체 어투가 담겨 있어 김여정이 직접 쓴 것으로 정보당국은 보고 있다.
김여정 담화 이후 북한 매체들이 남북관계로 북-미 비핵화 협상을 견인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을 ‘달나라 타령’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을 두고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 “직접 나서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이 미 대선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대결로 확정되자 움직임을 본격화하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것. 통전부의 5일 담화가 오후 11시경 나온 것 역시 미국 워싱턴이 한창 근무하고 있는 시간(동부 기준 5일 오전 10시)을 고려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외교당국 역시 김여정 담화 이후 움직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소식통은 “1차적으로는 한국에 상당히 강하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미국에도 대외활동에 대한 기지개를 켤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도 “일단 대남 도발을 먼저 할 가능성이 높지만 미국이 움직이지 않으면 대선 전 대미 도발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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