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17일 담화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특히 강조한 것은 ‘대북제재’였다. 문 대통령이 15일 남북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으며 나아가야 한다”며 ‘제재 틀 안의 협력’으로 선을 그은 것에 대해 김여정은 “지루한 사대주의 타령”이라고 공격했다. 최근 김여정이 주도하는 이례적인 대남 비방과 군사 도발 위협이 결국 미국이 주도해온 장기간의 대북제재에 ‘코로나 쇼크’까지 겹친 경제난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 김여정 “文의 제재 틀 안 협력” 맹비난
김여정은 총 4784자인 장문의 담화를 3개 주제로 나눴는데 첫 번째는 대북전단 관련 비난이었고, 나머지는 남북 합의 이행에 문 대통령이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이다. 쉽게 말해 “미국 눈치를 보면서 그동안 제재 완화나 해제 시도를 못 했다”는 것이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이 15일 “한반도는 아직은 남과 북의 의지만으로 마음껏 달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더디더라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으며 나아가야 한다”고 밝힌 것에 대해 “사대 의존의 본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지난 2년간 남조선 당국은 민족자주가 아니라 북남 관계와 조미(북-미) 관계의 ‘선순환’이라는 엉뚱한 정책에 매진해 왔고 뒤늦게나마 ‘운신의 폭을 넓히겠다’고 흰목을 뽑아들 때에조차 ‘제재의 틀 안에서’라는 전제조건을 절대적으로 덧붙여 왔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대북제재와 관련한 한미 협의기구인 ‘한미워킹그룹’을 꼭 집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김여정은 “북남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상전이 강박하는 ‘한미 실무그룹’(한미워킹그룹)이라는 것을 덥석 받아 물고 사사건건 북남 관계의 모든 문제를 백악관에 섬겨 바쳐 온 것이 오늘의 참혹한 후과”라고 했다. 북한이 남북 관계 ‘총파산’에 나선 것이 결국 제재 완화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힌 셈이다.
○ 제재-코로나 돈줄 마르는 北, 한국에 책임 전가
북한은 지난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을 내놓은 대가로 2016년 이후 추가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5건의 해제를 미국에 요구했다. 특히 2017년 12월 가장 마지막으로 통과된 결의 2397호는 북한산 식품과 농산물 등 수출을 금지해 사실상 북한의 주요 수출품목을 다 막았고, 주요 외화벌이인 해외 북한 노동자들도 2019년 말까지 모두 귀환시키는 것을 담아 북한엔 치명적이었다. 협상이 결렬돼 대북제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북한 무역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북-중 무역이 사실상 봉쇄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상황이다.
북한의 경제 위기는 수치로도 드러났다. IBK북한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4월 북한의 대중 무역액은 수출 221만 달러, 수입 218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총액이 90.1% 감소했다. 달러도 지속적으로 마르고 있다. 북한 상품무역수지 적자는 지난해 23억6000만 달러, 2018년 20억 달러여서 북한의 외환보유액 규모(2018년 25억∼58억 달러)는 줄고 있다. 올해 당 창건 75주년에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마무리해 경제 성과를 내야 하는 처지이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기존 제재에 코로나로 경제난이 가중됐고, 통치자금의 근원이 되는 외화 유입도 어려운 상황일 것”이라며 “암시장 경제, 장마당 경제도 타격을 받게 되고 평양시민 생활도 보장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제재의 약한 고리인 한국을 타격하고 있다”고 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하노이 회담은 김정은의 ‘애국헌신의 대장정’이었는데 결국 실망스러운 결과는 수령 지도력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며 “북한은 현재 어려운 상황을 김정은 탓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하고 그 희생양을 한국으로 삼은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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