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통일부 장관의 사의 표명에 이어 청와대 국가안보실을 비롯한 정부 외교안보라인 전반에 대한 인적쇄신론이 높아지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선택이 주목된다.
18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이날 김연철 장관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예정이다. 청와대는 사표 수리 여부가 결정되면 공식 발표하겠다는 방침이다. 김 장관도 이날 정상적으로 출근했다고 한다.
특히 김 장관이 전날 “남북관계 악화에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로 했다”며 사의를 표명한 것을 계기로 김 장관뿐만 아니라 청와대 참모진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권을 중심으로 분출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주도해 온 만큼 김 장관보다 국가안보실의 책임이 더 무겁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no deal)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한 같은해 4월 임명됐다. 반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초부터 함께 한 인물들이다.
또 외교안보라인을 향해 대미(對美) 등 국제관계에 얽매여 남북협력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한 채 소극적 태도로 임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전날 담화에서 “북남 합의가 한걸음도 리행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남측이 스스로 제 목에 걸어 놓은 친미사대의 올가미 때문”이라며 “북남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한미실무그룹’이라는것을 덥석 받아물고 사사건건 북남관계의 모든 문제를 백악관에 섬겨바쳐 온 것이 오늘의 참혹한 후과로 되돌아왔다”고 한미워킹그룹에 관한 불만을 표시했다.
북한이 남측의 특사 파견을 거절했다며 정의용 실장과 서훈 원장의 실명을 공개한 것은, 북측이 이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란 해석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안보라인의 책임을 묻거나 남북관계의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한 쇄신 차원에서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 실장 등이 2018년 3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평화 분위기 조성에 공헌한 점은 인정되만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이날 “정세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정부가 경계해야 할 건 안일함”이라며 “한 번의 판단 실수로 모든 걸 잃게 할 수도 있다”고 외교안보라인에 경고성 메시지를 냈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민홍철 의원은 안보라인 교체에 관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겠나”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고, 홍익표 의원 역시 “꼭 인적 쇄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외교·안보 라인 전체에 대한 재배치라든지, 또는 지금까지 했던 방식에 대해서 재점검하고 수정할 부분은 수정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김두관 의원은 페이스북 글에서 전날 김연철 장관 사의 표명에 대해 “안타깝지만 사임 자체가 대북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다”고 평가하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뜻을 뒷받침하지 못한 국무위원은 누구라도 책임을 지는 것이 정부 입장에 숨통을 틔우는 길”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가급적 빨리 대통령의 남북협력 방침을 뒷받침할 강단있는 인사를 찾아야 한다”며 “청와대 외교안보라인도 이런 차원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 사실상 청와대 안보실 개편을 요구했다.
외교안보라인 교체 필요성에 관한 목소리는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되기도 했다. 전날 문 대통령과 남북문제 원로들의 오찬에 참석했던 박지원 단국대 석좌교수는 이날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인터뷰에서 “참석한 한 분이 오늘의 사태를 불러온 외교안보라인에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안보라인을 교체하더라도 인재풀이 좁아 이들의 후임이 마땅치 않다는 반론도 있다. 과거에도 정 실장이 나이(74세) 등 이유로 수차례 사의를 표명했고, 후임으로 서훈 원장이 거론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재인정부에서 국정상황실장을 지내며 대북 협상 역할을 맡았던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차분하게 접근해야 될 문제 아닌가 싶다”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인사적인 조치를 바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차분한 계획과 장기적 로드맵 속에서 나와야 되는 문제”라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번 기회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통일부 장관 중심으로 개편해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백두혈통’인 김 제1부부장이 대남 관계를 총괄하고 있는 만큼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 통일부 장관을 맡아 김 제1부부장의 ‘카운터파트’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차기 대권 주자이자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지낸 정동영 당시 의원을 통일부 장관에 앉히고 NSC 상임위원장까지 맡겨 통일부에 힘을 실어줬다. 현재 김 장관의 후임으로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이인영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우상호 전 민주당 원내대표 등 정치인들이 언급되고 있다.
정동영 전 장관은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NSC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며 “지금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핵 문제고, 남북관계 문제다. 그러면 NSC는 통일부를 중심으로 끌어가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 실장 등 외교안보라인이 사의 표명을 하진 않았냐’는 질문에는 “사의 표명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인사와 관련된 부분은 최종 결정되면 그때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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