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 별세한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의 영결식이 15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육군장으로 열린다.
서욱 육군참모총장(장의위원장) 주관으로 오전 7시 30분부터 50분간 유족과 정경두 국방부 장관, 역대 육군총장 등 각계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약력 보고, 추모 영상 시청, 조사 및 추도사 순으로 진행된다. 이어 고인은 군사경찰 차량의 호위 속에 국립대전현충원 제2장군 묘역으로 운구돼 오전 11시 반 안장식을 갖고 영면에 들어간다.》
“장군아버지….”
6·25전쟁 때 가족을 잃은 최모 씨(78·여)는 조화가 들어서기도 전인 11일 이른 아침 백선엽 장군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그는 영정 사진이 놓인 빈소에서 헌화를 하며 눈물을 훔쳤다.
최 씨는 조문을 마친 뒤 접견실에서 백 장군의 부인 노인숙 여사(96)를 만나 “어머니, 앞으로도 효도하겠습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이날 빈소를 찾았던 박모 씨(75)도 기자에게 “아버지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게 해준 영웅”이라고 말했다.
최 씨와 박 씨는 각각 9세, 6세이던 1951년 겨울, 국군의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때 부모를 잃었다. 살던 마을이 완전히 불타 오갈 곳 없었던 두 사람은 백 장군이 세운 보육원(백선고아원)에서 자랐다. 당시 30대였던 백 장군은 눈밭에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위해 자비를 들여 지리산 일대 일본인 소유 적산가옥 부지를 매입했다. 보육원에 모인 200여 명 대부분이 열 살도 안 된 고아들이었다.
1952년 보육원이 문을 연 뒤 미8군과 기독교 단체인 선명회 등으로부터 옷가지와 음식 지원이 이어졌고 고아들은 고교 과정까지 이수할 수 있었다. 백 장군은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공산 게릴라)을 토벌하는 책임자였다. 토벌 과정에서 마을이 불타 부모를 잃었지만 고아들은 백 장군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 씨는 “모두가 살기 힘들었던 시절 (보육원에서 자란 건) 운이 좋았다. 그만큼 풍족하고 따뜻했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에 오른 뒤에도 종종 보육원을 찾았다. 최 씨는 “아버지는 오실 때마다 아이들을 두 팔로 부둥켜안고 반가워했다”고 기억했다. 보육원 출신들이 아직도 백 장군을 “장군아버지” “대장아버지”로 부르는 것도 보육원 인근 광주 상무대 비행장에 도착한 고인을 마중 나간 기억 때문이다. 박 씨는 “장군 특유의 과묵함이 있었지만 수많은 전투를 치른 군인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인상이 선했다”고 회상했다.
최 씨와 박 씨는 6·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봄 이후 5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백 장군과 다시 만났다.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사실을 자녀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수십 차례 주저했기 때문이다. 박 씨는 “혹여나 아버지를 찾으면 그분께 폐가 되지 않을까 염려해 엄두조차 못 낸 점도 있다”고 말했다. 최 씨는 “신문에 나온 아버지를 보고 (고인 사무실이 있던) 전쟁기념관으로 불쑥 전화를 걸었더니 ‘○○예요’라는 말에 바로 기억을 하시더라”며 감격해했다.
보육원 출신들이 만든 ‘백선회’ 회원이기도 한 두 사람은 6·25전쟁 60주년이었던 2010년 5월 8일 어버이날 백 장군과 다시 만난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백선회 회원 10여 명은 고인을 만나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고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박 씨는 “아버지는 연신 ‘잘 성장해줘서, 건강하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최 씨와 박 씨는 10일 고인이 별세한 뒤 생각날 때마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시민분향소를 찾았다. 14일 분향소 앞에 선 두 사람은 200m 이상 늘어선 추모객들을 보며 뿌듯해했다. 이들은 15일 안장식이 열리는 국립대전현충원도 찾아 고인의 넋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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