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엔 김일성광장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평양 중심부의 광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 약 200m에 있는 ‘비밀의 광장’이다. 위치는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 바로 옆, 평양 대성구역 김일성종합대학 옛 운동장 바로 아래다.
김일성대를 만 6년 다닌 기자도, 그리고 동창 누구도 우리가 매일 오갔던 운동장 바로 아래에 김일성광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경기도 평택에 살고 있는 최태선 씨(68)는 한국에서 비밀의 김일성광장을 가본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지시를 받고 각종 지하구조물을 건설했던 사회안전부 소속 인민경비대 6국, 일명 공병국 소속 소좌(소령) 출신의 탈북자다.
특히 그는 평양의 지하에 김일성, 김정일을 위해 만들어놓은 각종 지하 시설물의 공사에 참가한 경력을 갖고 있다. 각종 설로만 돌던 김 씨 일가 도주로의 실체 역시 그는 잘 알고 있다. 28일 그를 만나 평양시 지하 시설 건설의 역사를 들었다. 설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 지하철보다 먼저 건설한 김일성 땅굴
1952년 자강도 송원군에서 태어난 최 씨는 만 17세 때 공병국에 입대했다. 연·아연을 생산하는 화풍광산에서 갱장까지 지낸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광부들에게 주는 명예인 ‘공훈광부’ 1호 수상자였다. 사망한 뒤엔 애국열사가 됐다. 그런 가족사 때문인지 그는 땅굴을 전문으로 파는 공병국에 배속됐다.
그가 입대한 1969년 ‘반항공지하구조물’로 불린 평양 땅굴 1계단 공사는 거의 완공단계였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 시 지하 땅굴 건설은 1961년에 시작됐다. 당시 김일성이 “전쟁이 다시 터져도 최고사령부는 평양에 두겠다”고 말하자, 사령부를 보호한다며 군에서 제대한 나이든 병사들을 모아 비밀 건설 부대를 만들었다. 1계단 공사가 마무리될 때쯤 김일성의 지시가 다시 하달됐다.
“지금 남조선에서 고속도로를 만든다고 자랑하며, 우리보고 거북이라고 비웃는데, 우리는 평양에 먼저 지하철을 건설해야 한다. 1계단 공사가 완공됐다는 것은 비밀로 하라.”
1968년 평양에선 지하철 공사가 시작됐고, 1973년 천리마선이라고 불리는 봉화역에서 붉은별역을 잇는 노선이 마무리됐다.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완공되기 1년 전 먼저 평양이 지하철을 개통한 것이다. 서울을 앞서려고 땅속 100m 깊이에서 속도전을 벌이다 숱한 군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최 씨에 따르면 평양 천리마선은 ‘2단계’ 공사였을 뿐이다. 1978년 건설된 혁신선은 ‘3단계’였다. 그런데 지하철 공사보다 먼저 전쟁에 대비한 1계단 공사가 이미 1960년대에 완공된 것이다. 평양 시민의 교통 편의보다 김일성을 위한 지하 시설 공사가 먼저였던 셈이다.
더 놀라운 건 2계단 지하철보다 1계단 땅굴이 훨씬 아래쪽에 있다는 점이다. 평양 지하철은 전쟁이 터지면 평양 시민 대피 공간이 된다. 그런데 김일성의 땅굴은 더 아래 있기 때문에 대피한 평양 시민들을 인질로 머리에 이고 있는 모양새가 된다.
“평양 지하철의 유일한 환승역인 전우역에 가면 에스컬레이터로 150m 정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수직으로 보면 지하 100m 깊이에 지하철이 있는 셈이죠. 내려가서 다시 숨겨진 비밀입구로 가면 거기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150m 더 내려가 김일성 전용 땅굴이 나옵니다. 땅굴 너비는 당시 김일성이 타던 포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죠.”
# 지하 김일성광장의 비밀
기자는 평양에서 대학을 다닐 때 늘 궁금한 게 있었다. 김일성대 앞 삼흥역에서 다음 대성산 낙원역까지 가보면 중간에 무정차역 하나를 지난다.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가장 가까운 광명역이다.
‘17개 밖에 안 되는 지하철 역 중 한 곳은 항상 세우지 않고 통과하는 이유는 뭘까. 그럴 바엔 왜 지었지?’라는 의문이 생겼다.
최 씨는 그 비밀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김일성은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옵니다. 광명역으로 오면 여러 갈래로 빠지는 지하 통로가 있습니다. 우선 평양 외곽의 형제산구역 서포역까지 연결됐는데, 서포역은 김일성 전용 기차역입니다. 두 번째로 최고사령부 야전지휘소로 알려진 철봉산초대소(특각)로 갈 수 있습니다. 철봉산초대소는 6.25전쟁 때 김일성이 하루를 보낸 뒤 ‘모처럼 시원하게 잤는데, 좋은 기가 흐르는 곳 같다’고 말한 뒤 별장이 건설됐고 이후 야전지휘소로까지 확대됐죠. 평양 중앙당 청사까지 또 터널로 이어져 있습니다.”
주석궁에서 왼쪽 룡남산으로 터널로 이동하면 넓은 지하 공간이 나온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김일성광장’이다. 룡남산과 김일성대 옛 운동장 아래에 위치해 폭격에 안전하다. 이곳을 폭격하면 교정을 폭격해 대학생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하 김일성광장은 가로, 세로가 100m 이상이고 높이는 12m다. 전쟁 중이라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할 수 있도록 건설됐다. 최 씨가 입대한 1969년엔 이미 거의 완공돼 마무리 공사를 벌일 때였다.
“천정 마무리 공사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이때 김일성의 지시로 모스크바에서 터널을 전공한 박인빈이란 사람이 국장으로 투입돼 마무리했죠. 그는 북한에서 유일하게 터널국장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지하 김일성광장 옆에는 샘물터도 있다. 김일성대 교내 안에 있는 룡남산 김일성동상 바로 밑쯤 된다고 한다. 최 씨는 “김일성광장 한쪽에 큰 암반이 있었는데, 이걸 들어낼지 여부를 김일성에게 물었더니 그냥 놔두고 위에 식탁을 놓으라 해서 만찬장처럼 만들었다”고 전했다.
# 남침 땅굴 공사는 무력부 몫
최 씨는 여러 평양의 지하 구조물의 위치를 설명했지만, 평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다면 너무 자세한 설명은 혼란스러울 법도 하다. 결론적으로 평양에는 김 씨 일가만 이용하는 무수한 땅굴이 얼기설기 건설돼 있다. 대학교와 아파트, 병원 등과 연결돼 있어 폭격도 어렵다. 이 땅굴에는 지금도 군인들이 주둔해 물을 퍼내고, 관리하고 있다.
다만 최 씨는 평양 지하철이 유사시 시민 대피 공간으로 역할을 할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전승, 전우 역을 건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입구로 동시에 들어가는 테스트를 했습니다. 유사시 통과능력을 보기 위한 것인데 제가 봤을 때 폭격을 받으며 정신없이 밀려들어가다간 모두 깔려 질식사할 것 같았습니다.”
최 씨에게 1970년대 발견된 남침용 지하땅굴 공사에도 참여했는지를 물었더니 “그건 무력부 공병부대에서 했다”고 답했다. 그에 따르면 “무력부가 무식하게 뚫어 발각됐지, 훨씬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공병국이 했으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고 했다.
1970년대 평양-원산 고속도로를 만들면서 무력부가 일명 ‘10리굴’로 알려진 무지개동굴을 뚫었는데, 이때 수많은 군인이 죽었다. 공사 기일을 맞춘다고 군인들을 마구 밀어 넣었는데, 낙석이 떨어져 많이 죽었고, 발파 가스가 빠지기 전 군인들을 투입한 탓에 질식사한 이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무력부가 환기구를 내야 한다는 상식도 모르고 터널공사에 숱한 인력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안전부 소속인 박인빈 터널 국장이 직접 지휘를 했다.
# 연예인 아파트와 연결된 김정일 터널
공병국은 김일성의 지시를 직접 받아 중요 건설에 투입됐다. 지하 구조물 뿐만 아니라 창광원, 빙상관, 청류관, 평양산원 등 평양에서 유명한 건물도 공병국이 지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권력을 점차 빼앗아오던 김정일도 자신만의 건설부대를 가질 욕심을 내다가 결국 공병국에서 한 개 여단을 따로 독립시켰다. 이곳이 바로 김정일 특각 전문건설부대로 알려진 오늘날의 공병국 1여단이다. 공병국은 사회안전부 소속이었지만, 김정일은 자신이 장악한 1여단을 호위국에 소속시켰다.
1980년대 최 씨는 105층 유경호텔 인근의 공병국 운수중대에서도 근무했다. 그 부근인 지하철 황금벌역 뒤에 40층 아파트가 있는데, 이곳은 ‘예술인아파트’라 불렸다. 인기 연예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때때로 호위국 군인들에 의해 운수중대 통행이 통제되는 날이 있었다. 최 씨가 지인들을 통해 알아보니 중앙당 청사에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면 예술인아파트와 연결된 지하통로가 있고, 김정일이 계속 예술인아파트를 찾는다고 한다. 이런 날엔 호위국이 ‘행사경호’라는 이름으로 아파트를 둘러싸고 교통을 통제한다.
최 씨는 “공병국에 오래 있어 웬만한 내용은 다 아는데, 평남 덕천에 건설된 지하구조물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씨 일가 전용 터널을 건설한 뒤 많은 노병들이 덕천으로 갔는데 나중에 친구들을 만나 물어봐도 이 건설 내용만큼은 절대 말하지 않고 ‘무서운 굴’이라고만 하더라는 것이다. 평양 지하구조물 건설 때는 ‘비밀을 지킨다’는 손도장을 찍긴 하지만 같은 부대 동료들 사이엔 비밀은 없었다. 그런데 덕천 공사 내용만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을 다물더라는 것이다.
덕천에 간 공병국 대원들은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 자녀들도 김일성대를 비롯한 최고의 대학에 갔는데 이 정도 대우면 분명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최 씨의 추측이다. 현재 덕천에는 ‘폭풍군단’으로 알려진 북한군 특수전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최 씨는 “아무리 특수부대라도 군부 시설이라면 친구들도 말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분명 덕천 승리산 아래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성 쌓고 남은 돌의 행방
최 씨는 제대할 때까지 공병국에서 26년을 근무했다.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공병국 대우는 북한에서 최상급이었다.
“1980년대 양강도 삼지연군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할 때 갔는데, 그곳 김 씨 일가 특각을 지키는 호위국 군인들이 지방 쌀에 옥수수까지 먹고 있어 놀랐습니다. 우린 황해도 쌀만 먹고 각종 고기가 풍족했고, 명절엔 헬기로 남방과일까지 먹을 정도였죠. 호위국 군인들이 ‘너희는 무슨 부대이길래 이리 잘 먹느냐’고 부러워할 정도로 공병국에 대한 대우는 좋았습니다.”
최 씨는 군관으로 발탁된 뒤 공병국 내 제일 좋은 자리에만 있었다. 공병국 병원 경리지도원을 시작으로 양식지도원을 지낸 뒤 공병국 휘발유와 맥주 공급을 담당하는 실무자로 있었다. 쌀과 휘발유, 맥주, 육류 등 엄청난 물자를 주무르는 실세였다.
공병국은 ‘300호 행표’를 가지고 있었다. 300호 행표 소지자에겐 인원과 용도를 묻지 않고 물자를 공급하라는 김일성의 지시가 하달됐다. 대남연락소도 공병국과 동등한 300호행표로 공급받았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공병국은 ‘성 쌓고 남은 돌’ 신세가 돼 버림받았다는 게 최 씨의 얘기다. 김정일이 “나에겐 공병국 1여단만 필요하다”고 하는 바람에 김일성 지시를 받던 공병국은 ‘건설돌격대’로 명칭이 바뀔 처지에 놓였다. 졸지에 버림받은 부대가 되면서 제대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평양에 살던 최 씨도 1995년 제대를 선택해 17살 터울의 맏형이 함경남도당 선전부장으로 있는 함흥으로 내려갔다.
“충격이었죠. 장마당에 가니 사람들이 굶어죽어 시신들이 뒹굴었어요. 저는 1980년대 후반에 외국에 4년을 나갔다 왔고, 이후에도 공병국 휘발유, 맥주 담당 지도원을 하다 보니 사회를 몰랐어요. 배급을 왜 안주냐고 물으니 형님이 ‘사회 물정을 이렇게 모르냐’고 한숨을 쉬더군요. 4년 동안 딱 한 번 옥수수 2㎏과 쌀 1㎏을 배급으로 받았어요.”
함흥에서 살면서 최 씨는 ‘이 나라엔 더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러시아 벌목공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4년 뒤 그 꿈은 이뤄졌다. 열차가 떠나는 날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결심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 벌목장 탈출
1999년 12월, 그는 러시아 극동 아무르 주 틴다에 도착했다. 북한의 러시아 벌목 파견 사업은 1955년 협정이 체결돼 1956년부터 시작됐다. 초기엔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아 경제범들을 보냈다. 이때 벌목은 체그도민이란 도시에서 시작됐다. 벌목공 파견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커지자 북한은 점점 파견 인원을 늘여나갔다. 나중에 체크도민 지역에 나무가 없어지자 틴다를 신지구로 삼고 이곳에 중점적으로 벌목공들을 파견했다.
틴다에 도착한 최 씨는 5개월 뒤 사업장을 나왔다.
“월급이 당시 40달러였는데, 도망칠 수 있다며 1년에 한 번 정산을 해줬어요. 제가 갔을 때는 그것마저 이것저것 떼어내니 남는 것도 없었어요.”
2년 전 먼저 온 동료가 벌목장을 떠나 다른 곳에 나가 일하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보위원에게 말하고 기차를 타고 소개받은 동료를 찾아 떠났다.
러시아에는 벌목장을 이런 식으로 벗어난 북한 근로자들이 많다. 이들을 탈북자로 볼 순 없다. 벌목장에는 여름엔 러시아 다른 지역에 가서 건설이나 농사 등을 해주며 돈을 벌다가 눈이 오면 사업소로 돌아와 벌목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예 몇 년씩 사업소를 떠나 돈을 버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업소 간부들은 은근히 이런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러시아 정부에서 주는 월급과 문화비는 인원 숫자에 맞춰 사업소에 나가는데, 외부로 나간 벌목공이 많으면 이들이 받아야 할 러시아 정부의 월급을 보위지도원이나 재정지도원, 부기장 등이 짜고 떼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업소 밖에 나가겠다면 “종종 연락해주고 죽지 말고 살아 있다가 집에 갈 때 오면 된다”며 쉽게 승낙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양이 고향인 벌목공은 쉽게 나가기 어렵다. 자칫 오래 있다 돌아오면 평양에 있는 가족을 지방으로 추방시키기 때문이다. 북한이 벌목공을 선발할 때 평양 사람들을 위주로 뽑는 이유이기도 하다. 러시아 말을 잘 모르거나 외부 연줄이 없으면 밖에 나가도 돈을 잘 벌지 못해 사업소에 그냥 남아 일하는 사람도 많다.
# 바이칼의 ‘까레이 첸’
최 씨가 사업소를 떠나 자리 잡은 곳은 바이칼 호수 옆 인구 5만 명의 도시였다. 먼저 나간 사람을 찾아 갔는데 처음 한 일은 미장이었다. 3명이 2~3일 동안 일을 했더니 1인당 200달러가 나왔다. 사업소에선 5개월을 벌목해도 받기 어려운 돈이었다.
“우리가 미장을 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서서 신기한 듯 바라봤어요. 러시아 사람들 눈에는 북한 사람들의 미장 솜씨가 곡예처럼 보였거든요.” 마치 한국 사람들이 중국 요리사의 프라이팬 손놀림을 놀랍게 보듯 러시아 사람들 눈엔 미장이 그렇게 보인 듯하다.
까레이(조선인)들이 미장과 타일 시공, 용접, 온수난방 시설 수리 등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감은 계속 늘었다. 거기서 최 씨는 2016년까지 16년 동안 일했다.
“그 도시의 미장은 저랑 동료들이 다 한 거 같아요. 나중에 사업장을 떠나 그곳에 온 벌목공이 15명까지 늘었는데, 그 도시의 잡다한 일들을 우리가 다 했죠.”
1년에 한번 정도 사업소 담당 보위원들이 실태 조사를 한다며 오지만 그때마다 거나하게 접대하고 각자 100달러 정도 모아 찔러주면 “건강히 잘 지내라”고 격려까지 하고 떠난다고 한다. 한 도시에서 16년을 일하니 안 가본 집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동네 주민이 됐다. 과거 공병국 소좌 최태선은 이 도시에서 ‘까레이 첸’으로 살았다.
“한국에 갈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죠. 그런데 길을 몰랐어요.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여성들이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거쳐 한국에 간다는 내용을 들으면서도 ‘저 여자들은 공작원 훈련들 받았나. 어떻게 저기까지 갔지’하며 혀만 찼죠. 우리에겐 먼 얘기 같았어요.”
2016년에 한때 같은 도시에서 일하다 사라진 동료가 나타났다.
“‘최 아바이 아직도 있소? 난 남조선에 가서 사오.’ 이러면서 한국 여권, 비행기표, 스마트폰을 보여주는데 정말 가슴이 뛰었어요. 북한 벌목공들은 돈을 절대 숙소에 두지 않아요. 내일이 기약돼 있지 않으니 돈을 벌면 달러로 바꿔 팬티에 붙인 주머니에 차고 다니죠. 남조선(남한)에 가서 나도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해 그가 알려주는 대로 움직여서 한국에 왔죠.” 그때가 2017년이었다.
# 7세 소년의 꿈
최 씨는 공병국에 있던 1989년~93년 예멘에 파견돼 병원을 건설해준 적이 있다. 북부예멘 대통령이 평양산원을 구경하고 부러워하자 김일성이 공병대를 파견하라고 해 약 200명이 남강사업소라는 명칭을 달고 나간 것이다. 이 부대에서 최 씨는 후방지도원으로 물자를 담당했다.
“예멘의 고속도로가 1970년대 남조선 사람들이 와서 건설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1주일에 한번 동료들과 함께 홍해로 해수욕을 하러 가면서 고속도로를 타면 ‘와, 우리가 건설한 김일성 전용도로보다 이게 100배 더 좋다’라고 생각하며 달렸죠. 그때부터 남조선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해외에 나와 김 씨 일가의 호화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예멘의 북한 대사관 사람들의 임무 중 하나는 그곳의 명물 당나귀를 김정일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당나귀가 피가 맛있고, 밸(창자)이 두꺼워 순대를 만들면 씹을수록 고소하다고 해서 김정일이 곰 순대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라는 겁니다. 바이칼에 가니 또 그곳에만 사는 ‘오물(연어과 민물어종)’이란 물고기를 버드나무 연기로 훈제해 김정일에게 보내는 게 모스크바 대사관의 중요한 업무더라고요. 인민들은 굶어죽는데, 전 세계에 대사관에선 김정일에게 보낼 상납용 식품 구입하느라 정신없으니 화가 안 나겠습니까.”
한국에 온 최 씨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과 달리 평택은 경비원 자리가 구하기 쉬웠다고 한다.
요즘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그가 7세였던 1959년 고향인 화풍광산에 북한 바이올린의 전설 백고산이 왔다.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명성을 떨친 다음해 바람을 피웠다는 죄명으로 광산 노동자로 내려온 것이다. 광산 회관에서 백고산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그는 집에 가서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졸랐다. 강냉이밥도 귀하던 어려운 시절에 어머니는 허리띠를 조이고 조여 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었다. 최 씨는 인민학교 같은 학급이 된 백고산의 딸을 졸라 연주를 배웠다. 안타깝게도 얼마 안돼 백고산은 복권됐는지 딸과 함께 마을에서 사라졌다. 이후 예멘과 러시아에서 바이올린을 가끔 연주해보긴 했지만 그때는 하루하루 바빠 연주할 여유가 없었다.
요즘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간을 맞았다는 그는 경비원으로 일해 조금씩 모은 ‘거금’ 50만 원을 주고 바이올린을 새로 샀다. 북한과 예멘, 러시아를 돌고 돌아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는 바이올린에서 그동안 잊었던 7세 동심의 떨림을 다시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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