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 기다려줘, 꼭 성공할게” 탈북민 인생 바꿔놓은 소형 캠코더[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9일 14시 00분


“꿈을 향해 달렸다. 길이 나타났다.”

허영철 원코리아 미디컴 대표가 지난해 11월 전쟁기념관에서 국군포로 관련 다큐를 촬영하고 있다. 허영철 대표 제공
허영철 원코리아 미디컴 대표가 지난해 11월 전쟁기념관에서 국군포로 관련 다큐를 촬영하고 있다. 허영철 대표 제공
한국에서 처음 본 소형 캠코더가 마흔 살 늦은 나이의 한 탈북민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꿈을 향해 17년 동안 잠시도 한 눈을 팔지 않고 걸어왔다. 이제 그는 세계 최초를 꿈꾼다. 허영철 원코리아 미디컴 프로덕션 대표(57)의 이야기다. 대표, 감독, PD 등 다양한 직함으로 알려진 그의 삶은 한국에 온 탈북민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 “사람이 하는 거라면….”
2004년 3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영상교육센터 원장은 난감한 학생을 만났다. 6개월 과정의 유료 영상미디어교육 공고를 신문에 냈는데 41세 탈북민 남성이 부산에서 찾아와 배우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그런데 영상 편집에 필수적인 컴퓨터의 ‘컴’자도 몰랐다. 원장이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숱한 학생을 교육시켰지만, 3가지가 처음입니다. 탈북민 교육생도, 마흔이 넘어 영상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도, 제일 중요하게는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처음입니다. 웬만하면 다른 일 찾는 게 어떨까요.”

남성은 한참 머리 숙이고 있더니 말문을 열었다.

“원장님. 신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면 배우겠습니다.”

허 씨는 이렇게 영상교육의 세계를 만나게 됐다. 태어나 그렇게 절박하게 공부한 적은 처음이었다. 부산에 젊은 아내와 세 살 어린 딸을 남겨두고 떠나온 길이었다.

“3개월을 죽도록 공부하니 컴퓨터가 너무 쉬워졌어요. 그리고 영상 촬영과 제작이 제 적성에 너무 잘 맞는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6개월 과정을 졸업할 땐 원장도 한 사람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 씨가 영상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건 2003년 1월 탈북민정착지원기관인 하나원에서 캠코더를 처음 본 게 계기였다.

“하나원에서 지방 도시에 견학을 갔는데 자원봉사자들이 손에 작은 캠코더를 들고 와 찍어줬어요. 그리고 영상을 편집해 동영상을 주는데, 그때 ‘어떻게 요런 작은 걸로 영화를 만드는가’하고 놀랐죠.”

강열한 인상을 받은 그는 하나원에서 나오자마자 캠코더부터 구입했다. 무턱대고 찍고 영화를 만들어 보려 했지만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배울 곳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신문에 실린 영상교육 광고를 봤을 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심정이었다. 집을 나서던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5년만 날 믿고 기다려줘. 꼭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 편안하게 살게 해줄게.”
지난해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허영철 대표. 허영철 대표 제공
지난해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허영철 대표. 허영철 대표 제공


# 부산영화제 입상
영상 촬영과 편집에 자신감이 붙은 허 씨는 머리 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단편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뿌리’라는 제목의 첫 작품은 단번에 2005년 3월 부산시네마영화제에서 창작상을 받았다. 자신감이 샘솟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뿌리는 그의 집안의 역사를 담은 작품이었다.

허 씨의 부친은 6.25전쟁에 북한군 장교로 참전했다. 부친은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에 정통해 1948년 소련의 주도로 북한군이 창설될 때 통역 장교로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남진하는 부대에서 진격하던 부친은 마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포로가 됐다.

포로수용소에 가서도 그는 친공 포로들만 격리 수용된 76포로수용소의 선전 책임자를 지냈고, 전쟁 직후 북한으로 돌아갔다. 부친에게 6.25전쟁 3년의 기억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의 추억뿐이었다.

거제도에서 미군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고, 동요하는 동료들을 죽이며 북한에 대한 충성을 굽히지 않았지만, 북에 돌아간 포로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북한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귀환 포로들은 오지의 탄광과 광산 등 가장 힘든 일자리에 배치됐다. 허 씨의 부친도 양강도로 파견됐다. 다행히 수용소에서 격렬한 투쟁을 주도한 장교 출신임을 인정받아 나중에 혜산 문화회관 관장을 지냈고, 결혼도 해 아들만 여섯을 낳았다. 허 씨는 셋 째 아들로 1963년 태어났다.

2003년 1월 한국 사회에 정착한 허 씨는 어렸을 때 늘 듣던 아버지의 무용담이 사실인지 궁금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갔다. 거기서 “포로로 살면서도 막사에 공화국기를 내걸고 깡통으로 오각별 모표를 만들어 모자에 붙이며 북한군처럼 규율 생활을 했다”던 아버지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거제도 위령탑 앞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니, 한국을 삼키려 남침했다 포로가 돼 죽은 자들을 위해 왜 위령탑까지 세워준 거지. 여긴 어떤 사회인가.”

그는 영상을 배운 뒤 다시 거제도를 찾았다.

“아버지는 포로로 거제도에 왔지만, 아들은 거제도에 자유로운 관광객으로 찾아왔다. 두 번 다시 이 땅에 이런 기념관과 위령탑이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함께 뿌리내리고 살아야 할 한 민족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구한 운명을 교차시켜 편집한 다큐는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입상의 영예를 받았다.

# 쉬지 않고 달리다
부산 영화제에서 입상하자 부산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서 PD 겸 리포터로 일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이 왔다. 리포터 겸 편집, 촬영까지 모두 허 씨가 진행했다. 1년 뒤 울산KBS ‘생생투데이’ PD로 옮겨 2년 더 일했다.

방송 일을 하고 보니 리포터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 결국 리포터를 그만두고 촬영과 편집에만 몰두했다. 무보수로 몇 년을 감독들과 PD들을 따라다니며 배웠다.

그러나 그는 가장이기도 했다. 영상 제작 만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허 씨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아침 7시까지 세탁물 배달을 했다. 낮에는 학원이나 촬영장을 다니며 영상을 배웠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다시 한약 배달을 했다. 주말엔 건설장에 나가 일했다. 매달 세탁물 배달로 100만, 한약 배달로 80만, 건설일로 80만, 도합 260만 원을 벌었다. 아내는 마트에서 일했다.

몇 년을 이렇게 살면서 드디어 부산 신라대 앞에 마트를 인수했다. 허 씨는 마트 계산대 옆에 작업실을 만들었다. 밤을 새며 작업실에서 편집하다 손님이 오면 뛰쳐나가 팔았다.

행운도 따랐다. 신라대에는 중국 유학생들이 많았다. 허 씨 부부가 중국어를 하는데다, 덤으로 몇 개씩 주는 등 인심 좋다는 소문에 유학생들이 허 씨 가게에 몰려왔다.

몇 년 동안 도장 깨기를 하듯 그는 촬영과 편집, 컴퓨터그래픽(CG), 색보정(DI) 등 기술을 하나하나 익혔다. 영상 촬영과 편집에 있어 모든 것이 자신 있다고 생각된 순간, 그는 자기가 만든 영상에 영혼이 없다고 느껴졌다.

시나리오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산작가교육원에 입학해 3년 동안 시나리오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한국 생활 내내 그는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다빈치 리졸브’를 공부하고, 유튜브와 홀로그램 제작을 배우고 있다.

# 사무실이 습격당하다.
허 씨는 가족과 함께 2008년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이유가 있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부산에 150평 스튜디오를 임대했다. 허 씨는 지금도 2005년 5월 첫 방송 카메라를 손에 넣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전까지는 작은 캠코더로 찍었습니다. 그러다 돈을 모아 드디어 방송용 촬영 카메라인 소니PD 150을 구입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침까지 카메라를 끌어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죠.”

그렇게 어렵게 영상 제작을 시작했다. 첫 작품으로 탈북민의 정체성을 살려 탈북 과정을 그린 ‘자유’라는 다큐를 제작하려 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만든다는 소식이 언론에 소개되자마자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북한에서 협박이 날아왔고, 수시로 전기선이 끊기는 등 알게 모르게 방해 움직임이 나타났다. 급기야 2007년 6월 어느 아침, 스튜디오가 완전히 박살이 나있었다. 어렵게 구한 촬영 장비들이 부셔졌고, 컴퓨터에 저장됐던 촬영 및 편집본도 모두 사라졌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범인을 잡을 수 없었다. 그에겐 지금까지도 가장 아픈 기억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서울은 부산에 비해 인구가 훨씬 많아 일거리도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부산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 2008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 PD직에 합격했다. 800명이 면접을 보고 40명을 뽑아 교육을 시킨 뒤 10명만 선발하는 과정인데, 허 씨는 당당히 합격했다. 이곳에서 3년을 일했고, 스포츠TV 촬영 업체로 옮겨 또 10년 가까이 일했다.

스튜디오와 장비를 완벽히 갖추고, 촬영에서 편집까지 혼자서 다 해내는 감독이 있다는 소문에 이제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감독들에게서 오더(주문)가 계속 들어온다. 경력이 쌓이면서 주문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2017년 스포츠카 경주 촬영을 위해 현장에 간 허 대표. 허영철 대표 제공
2017년 스포츠카 경주 촬영을 위해 현장에 간 허 대표. 허영철 대표 제공


# 가족의 힘
한국에서 영상 제작의 한 길로 매진하는 동안 가족은 큰 힘이 됐다.

허 씨는 북에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군에 나갔다. 전방 2군단 3사단 소속 공병부대에 입대해 개성시 장풍군 귀존리에서 1년 동안 비무장지대(DMZ)에 지뢰를 매설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때 경험으로 올해 화제가 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이후 자동차 운전병 양성 교육을 받고 포차를 끌었다.

만 10년 복무를 마치고 고향인 혜산에 돌아가 결혼을 했고, 백두산청년들쭉사업소 사로청위원장을 2년간 지냈다. 이후 혜산식품연합회사 자재지도원으로 옮겨갔다. 물자를 다루는 식품회사 자재지도원은 남부럽지 않은 직업이었다.

그러다 고난의 행군 때 삶이 꼬이기 시작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고 불평한 것이 보위부에 걸려 1996년 새해를 하루 앞두고 체포됐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주변 사람들이 줄줄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6월 중국에 넘어가 몇 달 숨어 지내다가 다시 집에 왔다. 하지만 그를 아껴주었던 양강도 인민위원회 상업부위원장이 1997년 2월 처형되는 것을 보고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들어 아내와 함께 탈북했다.

첫 탈북은 실패했다. 중국으로 넘어가자마자 체포돼 양강도 대홍단군을 통해 북송됐다. 대홍단군 보위부 반탐과장이 직접 그와 아내를 호송해 혜산으로 떠났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든 허 씨는 압록강 옆 도로를 따라 이동하던 도중 어둠이 내리자 반탐과장과 다른 보위원 1명을 때려눕히고 중국으로 뛰었다.

보위원을 때려눕히며 아내에게 “뛰어”라고 소리치는 순간 아내는 남편을 믿고 차에서 뛰어내려 정신없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쪽으로 향했다. 허 씨도 뒤따라 강을 넘었지만 아내를 잃어버렸다. 압록강 건너편 중국 쪽에서 둘은 산에서 각자 온밤을 헤맨 끝에 다음날 아침 눈물의 상봉을 했다.

부부는 연길에 들어가 숨었다. 과수원 일도 해주고 별장 관리도 하면서 2년 넘게 살았지만 1999년 5월 또 체포돼 북송됐다.

허 씨는 7개월을 함경남북도의 보위부 감방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냈다. 아내는 몸이 허약해져 다 죽게 되자 북한은 그를 먼저 집에 보냈다.

2000년 2월 허 씨는 고향으로 이송됐다. 혜산에 가면 과거 보위부 간부를 때려눕히고 뛴 전력이 들키게 될 판이었다. 혜산을 두 역전 앞두고 그는 다시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도보로 집에 숨어들어 다시 아내를 데리고 그날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이번엔 청도로 옮겨갔다. 청도에 처음 갔을 때는 폐지와 빈병을 주워 팔며 먹고 살았지만, 나중에 한국 사장을 알게 돼 한국 식품회사 경영을 봐주며 편안하게 살았다.

삶이 안정되자 2001년 딸이 태어났다. 딸이 태어나는 날 그는 답답한 마음에 은하수가 흘러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한에도, 중국에도 국적을 둘 수 없으니 너는 하늘을 국적으로 걸어둬라.”

그래서 딸 이름을 은하로 지었다.

중국에서 언제까지 마음을 졸이며 살 수는 없었다. 2002년 5월 부인과 딸을 데리고 청도 한국영사관에 들어갔다. 그러나 영사관에선 “받아줄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해 8월 그는 몽골로 향했다. 1살 어린 딸을 업고 부부는 이글이글 타는 몽골의 사막을 걸어 넘어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 10월 부부는 한국에 들어왔다.

그랬던 딸이 이제는 어엿하게 컸다.

“딸이 학교 다닐 때 한번도 못 갔어요. 학교에선 은하가 탈북민 자녀인 걸 모르거든요. 말투가 이상한 우리가 갔다간 아이가 곤란한 상황을 겪을까 봐 못 갔죠. 그러다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야 처음으로 우리 부부가 학교에 갔어요.”

허 씨는 군말 없이 남편을 따라 탈북했고, 지금까지도 묵묵히 옆을 지켜준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보위부원을 때려눕히고 뛸 때도, 중국에서 폐지를 팔 때도, 몽골 사막을 넘을 때도 아내는 제 옆에 있었죠. 여기 와 남편이 영상에 미쳐 가정을 미처 돌보지 못해도 자기가 돈을 벌며 뒷바라지 해줬어요. 이제 우리는 혁명전우와 마찬가지예요.”
2018년 식품 광고를 촬영하고 있는 허영철 대표. 허영철 대표 제공
2018년 식품 광고를 촬영하고 있는 허영철 대표. 허영철 대표 제공


# “하면 된다.”
허 씨는 늘 낙천적인 성격이다. 그의 좌우명은 “하면 된다”이다.

“지금은 그렇지만 항상 낙천적이진 않았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뭘 먹고 살지 고민하다 군에서 운전병 했던 경력을 살려 정비사가 되려 했어요. 6개월 정비학원을 다녀 정비사와 기술검사 자격증 2개를 따고 10군데 넘는 카센터에 찾아갔는데 어디서도 취직이 안됐죠. 나는 여기서는 쓰레기인가 싶더라고요. 그때는 자살을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죠.”

다행히 영상을 배우면서 인생을 새로 설계하게 됐다. 17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그는 다른 탈북민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탈북민들은 한국에 오면 빨리 적성을 찾아야 해요. 북에선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됐지만 여긴 직업이 너무 많아요. 어떤 직업이 내게 맞는지 탈북민들은 모른다는 게 문제죠. 한국에 오면 공부를 하던지, 아니면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달인이 되던지, 두 가지 중 한 길을 선택해야 해요.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보고, 화려함을 버리면 한국엔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참 많아요. 한국에 온 탈북민들은 10년만 지나면 성공한 자, 실패한 자, 그 자리에 머문 자로 3부류로 갈려요. 그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국에 와서 3년만 죽기 살기로 매달리면 30년이 행복하고, 3년만 허송세월 낭비하면 30년을 실패한다’고 말입니다. 한국은 정신이 올바르게 박히고 몸만 건강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정부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고, 탈북민들은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게 허 씨의 조언이다.

“저는 탈북민이라서 좋은 점이 많아요. 북한 관련 영상을 제작할 일이 있으면 제가 경쟁력이 있거든요. 가령 북한 다큐 찍을 때 누가 북중 국경에 가서 실감 나게 찍을 수 있을까요. 북에서 온 우리의 경쟁력을 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마흔 넘어 정착해 벌써 이만큼 왔잖아요.”

올 10월 석 달째 계속 작업 중인 장편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허 대표(오른쪽 두 번째). 허영철 대표 제공
올 10월 석 달째 계속 작업 중인 장편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허 대표(오른쪽 두 번째). 허영철 대표 제공
허 씨는 지난해 김포에 50평 규모의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차렸다. 영화 촬영에 필요한 고가의 장비들도 모두 갖췄다. 지금까지 돈을 벌어 끊임없이 재투자를 한 결과다.

가을부터는 스튜디오 옆에 100평 규모의 미디어박스를 새로 건설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곳에 영화 촬영 세트장과 홀로그램관을 만들 생각이다. 허 씨는 6년째 매년 탈북민 10명 정도를 선발해 장학금까지 주며 미디어교육을 시킨다. 내년부터는 연기학원도 만들 계획이다. 그의 꿈이 현실화된다면 김포는 탈북민 및 북한 관련 영상제작의 ‘메카’가 될 것이다.

그의 꿈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의 꿈은 시나리오, 연출, 촬영, 편집, 그래픽, 디자인, 합성 등을 모두 혼자서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에 1인 완성 영화제작자가 1명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면 세계에서 두 번째가 되죠. 여기에 제가 연기까지 하게 되면 세계 최초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미 허 씨는 자기가 직접 쓴 영화 시나리오도 3개 완성시켜 다듬고 있다. 그는 “배우 3명 정도를 쓰는 인건비와 약간의 제작비만 투자를 받으면 5억으로 50억 원짜리 영화를 만들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편집까지 다 하면 상당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촬영을 미리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편집을 감독이 할 줄 알면 딱 필요한 것만 촬영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감이 뿜어 나오는 그의 눈을 보니 그 꿈이 머잖아 이뤄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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