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위 중반 접어든 김종인, 반복되는 리더십 위협
폐쇄적 엘리티즘 고집, 소통 소홀…리더십 위기 자초
정당민주주의 경험 부족…'내가 다 안다' 선민의식도
내부 갈등 표면화…"모든 정치 일정·인사 독단 결정"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대위 체제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당내 기류가 예사롭지 않다. 김 위원장의 당 운영 방식을 둘러싼 불만이 지도부로 확산되면서 ‘투톱 갈등’ 양상으로 불거진데다, 일부 중진을 중심으로 비판에 가세하면서 김 위원장의 리더십이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당의 명운이 걸린 재·보선 준비가 시작부터 삐걱거리면서 김 위원장의 리더십 논란도 가열되고 있다.
지난 4·15총선에서 역대급 참패로 파산 직전에 몰렸던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을 구원하기 위해 영입된 김 위원장은 취임하자마자 기본소득, 전일보육제 등 다양한 어젠다를 내놓으며 당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높여나가기 시작했다. 이는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시절 박근혜 비대위 산하 정책쇄신분과 위원장을 맡아 경제민주화란 의제를 공론화해 진보 정당의 전유물이었던 어젠다를 선점한 방식과 유사한 전략이다. 8년 전과 마찬가지로 보수 색채를 뺀 진보 성향 정책을 제시해 어젠다 싸움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책 뿐만 아니라 상임위원장 배분 등 원내 현안에서도 상당한 입김을 내 사실상 전권(全權)을 휘두르고 있는 김 위원장은 1인 지배체제를 한동안 공고히 다져나갈 것으로 보였다. 지지율이 한때 민주당을 추월할 땐 내년 4월 재·보궐 선거가 끝나더라도 계속 유임시켜 대선 관리까지 맡겨야 한다는 ‘김종인 대세론’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이처럼 순항하는 듯했던 김종인호는 비대위원장 임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추미애 장관의 아들 의혹, 윤미향·이상직 사태, 북한군의 해수부 공무원 사살 사건, 라임·옵티머스 사태 등 여권발 악재가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데도 국민의힘 지지율은 20~30%대 박스권에 정체돼 있자 당 안팎에서 김 위원장의 리더십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러한 리더십 논란의 이면에 ‘엘리티즘(elitism)’에 기인한 김 위원장의 정치 철학이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김 위원장의 통찰력에 대한 평가는 큰 이견이 없는 편이다. 한 야권 인사는 “김종인 위원장이 팔순의 고령에도 정치적 식견이나 감각은 탁월해서 쉽게 무시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여우 같은 정치인”이라고 했고, 국민의힘 고위 당직자는 “다양한 분야에 굉장히 해박하고 중요 사안도 빨리 인지해 적절한 타이밍에 화두를 제시할 줄 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간혹 중요 현안이나 민감한 사안의 경우 소수의 측근에게만 귀를 열거나 자신의 통찰에 의지해 독선적인 방식으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이런 폐쇄적인 방식으로 내린 결정을 당에 제안하고 당이 무조건 따르도록 하는 과정에서 마찰을 빚는 경우가 있다. 정치권력의 소수 독점과 하향적 통치 질서와 가까운 엘리티즘적인 정치 스타일이 리더십 논란을 자초한다는 지적이다.
김 위원장이 정강정책 1호로 삼은 기본소득이 대표적인 예다. 그가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첫 화두로 꺼낸 기본소득은 정치권에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사전에 당 지도부와도 충분한 교감이 없었다. 기본소득을 놓고 보수 성향 의원들이 많은 국민의힘에서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다.
이른바 공정경제3법(공정거래법·상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도 마찬가지다. 의원들을 상대로 충분한 소통이나 설득 작업 없이 자신의 소신대로 정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피력하고 당론으로 밀어붙이려 해 불필요한 갈등을 촉발한 측면이 없지 않다.
8년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에서 현재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서 권력은 더 세졌지만, 지지 기반이 약한 김 위원장이 리더십을 온전히 발휘할 우호적인 환경은 아니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김 위원장은 새누리당 비대위원 시절 차기 대선주자로서 당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경제민주화 등 진보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4년 전 민주당 비대위 시절에도 김 위원장은 당시 문재인 당대표가 상당한 권한을 위임한 덕분에 이해찬, 정청래 등 친노, 친문 핵심 인사를 총선 공천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사실상 계파가 없는 김 위원장이 당을 옮겨 다니면서도 ‘차르’로 불릴 만큼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국민의힘에선 김 위원장을 향한 반발을 제압할 만큼 영향력 있는 원로·중진이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가 존재하지 않아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 힘든 실정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비대위에서처럼 총선 공천권을 행사해가며 의원들을 수월하게 관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결국 기댈 언덕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도 민감한 사안마다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 위원장의 리더십 위기는 여론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엘리트주의적인 정치를 고수함으로써 파생된 문제로도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여권에서 공정경제3법 입법화를 추진하자, 이를 찬성하면서 당 지도부와 상의 없이 갑자기 노동관계법 개정을 화두로 툭 던졌다. 보수 당원이나 재계를 달래기 위한 정치공학적 판단에서 나온 묘수라기보다는 김 위원장 본인의 40년 숙원을 담은 제안이라는 분석이 많다.
결과적으로는 당에서도 노동 개혁을 지지하긴 했지만, 경제민주화 의제에 비하면 여론의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진 못했다. 국내 노조 가입률이 10%에 불과한데다, 양대노총에 편입된 대기업 노조 외에 중소기업이나 영세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미미해 일반 국민들에게 노동 개혁은 민생과는 거리감 있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혼선이 일었다. 주 원내대표를 비롯한 상당수 의원들은 노동관계법 개정을 공정경제3법과 연계해 동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 위원장은 선(先) 경제3법, 후(後) 노동개혁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지도부에서 동일한 의제를 두고 엇박자를 냈다.
재·보궐선거 경선준비위원회를 발족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새어나온 것도 당내 여론을 간과한 것이 문제라는 말이 나온다. 무엇보다 소수 의원들 사이에서 내재됐던 불만이 당 지도부에서 표면화된 것도 가볍게 볼 사안은 아니다.
김 위원장은 원내지도부를 ‘패싱’한 채 사무총장과 재·보선 대책위 인선을 논의하고 친박계 출신 유일호 전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내정했다가 주 원내대표의 반대로 철회했다. 유 전 부총리 대신 3선의원으로 급하게 교체해 갈등을 봉합했지만, 선대위를 구상했던 김 위원장의 구상과 달리 경선 규정만 논의하는 수준으로 위원회 역할과 위상이 축소됐다.
경선준비윈회에 참여하는 한 인사는 뉴시스와 통화에서 “사전에 언질도 없이 일방적으로 위원으로 지명됐다고 통보받았다”며 “나를 추천한 인사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혹시 다른 불순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당혹스러웠다”고 전했다.
다른 경선위원도 “당 지도부와 사전에 재보궐 선거에 대한 의견을 나눈 적은 없다”면서 “내년 서울시장·부산시장 선거에서 지면 당은 정말 문을 닫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하지만 경선준비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얼마나 힘이 있겠나”라며 비대위 들러리에 불과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국민의힘은 경선준비위원장을 교체한 배경으로 특정 계파의 개입, 일부 원외인사의 자리 욕심 탓으로 돌렸으나 당 주변에선 ‘투톱 갈등’을 더 주시한다.
당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대위원장을 삼고초려하다시피해서 영입한 주 원내대표마저 재·보선 인선을 문제 삼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쏟아낸 것은 사실상 김 위원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김 위원장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 방식이 지도부 안에서 소통 논란으로 불거졌고 급기야 ‘투톱 갈등설’이 당 밖으로 흘러나올 만큼 위험 수위라는 것이다.
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통화에서 “유일호 전 부총리가 친박계여서 특정 계파가 반대해 내정이 철회된 것으로 알려지는게 차라리 당을 위해선 더 나을 수도 있다”며 “경선준비위원회 인선 과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장제원 의원도 ‘(지도부) 내부 갈등’을 지적하면서 “모든 정치 일정과 인사를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비대위의 문제가 다시 한번 외부로 드러난 것 같다”고 했다.
장 의원은 “지나치게 독선적인 당 운영이 원내외 구성원들의 마음을 떠나가게 하고 있다”며 “김 위원장께서 ‘내가 결정한 일은 무조건 옳으니, 다른 말 하지 말라’ 라고 한다면, 누가 따르겠는가. 위기 극복의 가장 큰 힘은 배려와 통합이고, 가장 큰 적은 불신과 배척”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을 리더십 문제와 연계해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김 위원장의 정치 경력은 40년에 달하지만 다른 정치인과 달리 정당민주주의를 제대로 터득하지 못한 탓에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장 의원도 김 위원장을 겨냥해 “자신만이 옳다는 선민의식은 소수의 완장을 등장시키고 그로 인해 당은 위축되고 쪼그라든다”고 비판한 바 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뉴시스와 통화에서 “김종인 위원장은 엄밀히 평가하면 정당민주주의 훈련을 제대로 했다거나 그런 경험을 풍부하게 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관료를 하다가 나중에 비례대표가 된 거 아닌가. 사실 비례대표를 다섯 차례나 한 것도 초유의 일이긴 한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정당에 뿌리를 두고 바닥부터 정당민주주의 훈련을 받은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엄 소장은 또 “정당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복잡한 곳이라 시끄럽고 비효율적인 부분도 있는데, ‘내가 다 안다’ 그런 식으로 정치권을 환자에 비유하고, 본인이 선민의식이 강하다”며 “지금의 갈등은 비대위 출범부터 내재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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