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46대 대통령 선거가 개표 5일 만에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당선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바이든이 대국민 연설을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선거는 전혀 끝나지 않았다는 게 단순한 팩트”라 주장하며 불복 의지를 표명하며 소송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몇몇 경합주에서 재검표가 이뤄지더라도 결과가 뒤집히기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미국의 새 지도부는 얼마나 빨리 내홍을 치유하고 회복의 길로 나아가느냐라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을 다시 미국답게
선거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바이든 캠프의 슬로건인 ‘미국의 영혼을 위한 싸움(The Battle for the Soul of the Nation)’이 눈에 들었습니다. 국내적으로 증오와 분노가 팽배해진 미국 사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우선주의 기조가 만든 동맹국들과의 반목을 청산함으로써 미국을 다시 미국답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겼습니다. 바이든은 대국민 연설에서도 “분열이 아닌 단합을 추구”할 것과 “미국이 다시 세계로부터 존경받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바이든이 강조하는 ‘존경받는’ 미국이란 초강대국이 가진 물리적인 힘, 즉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군사력이나 세계 최대의 경제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미국인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바로 ‘자유(freedom)’와 ‘법치(rule of law)’입니다. 미국인들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이 두 가지를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가치이자 미국 정치체제의 근간으로 꼽을 것입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은 자유와 법치
미국이라는 나라가, 또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자유와 법치를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가치로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 실상이 매우 다르다고 느낄 때도 자주 있습니다.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이른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시위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와 약탈은 그야말로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거 결과에 불복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언급하며 인종 갈등을 부추기는 현직 대통령의 모습이나 소요사태를 걱정하여 총기를 사들이는 주민들은 과연 미국의 정신이 자유와 법치에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120년 만에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선거에서는 7400만이 넘는 미국의 유권자들이 미국의 정체성을 내세운 바이든 후보를 지지하였습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출범하게 될 바이든 행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 미국의 정체성을 더욱 강조할 것입니다. 정체성의 정치는 국제정치의 현장으로도 확산될 것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규칙에 입각한, 자유를 위한 협력과 공조, 법치와 인권 보장 등은 바이든 행정부가 구축하고자 하는 국제 질서의 핵심적인 화두가 될 것입니다.
●규칙 설정을 둘러싼 경쟁과 동맹
문제는 이러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내세울 미국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이 우리의 실질적인 국익과 충돌하는 장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러시아와의 대립과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다시금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 간의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고, 다자간 협력에 힘을 쏟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 쪽만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미중간 패권 경쟁은 이념에 입각한 단순 군사력의 경쟁이라기보다는 5G나 AI와 같은 최신 과학·기술 분야의 시장을 누가 선점하고 규칙을 정립해 가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 미소 냉전 때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과는 동맹관계이자 인접국 중국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입니다. 어느 편을 더 ‘신뢰’하느냐, 어느 편의 규칙을 준수할 것이냐는 관념적인 틀에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최대한의 국익을 지켜낼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대한민국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입니다. 우리의 체제와 정체성도 미국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를 수 없습니다. 다가오는 위기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가기 위해 우리 스스로의 가치관을 다시금 재정립하고 흔들리지 않는 외교로써 실리를 착실히 추구해 가야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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