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문제에 위안부 판결까지…한일 관계 또 살얼음판

  • 뉴시스
  • 입력 2021년 1월 8일 16시 00분


"위안부 판결, 피고가 일본 정부라 출구전략 어려워"
"정부, 한일 관계 개선 논의 와중에 폭탄 터져 곤혹"
美 바이든 정부 출범 후 한일 관계 개입 나설지 주목

한국 법원이 일본 정부의 위안부 피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 일본 측의 거센 반발로 한일 관계가 더욱 냉랭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를 놓고 접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피고 자격인 위안부 판결 문제까지 다시 부각되면서 한일 관계 개선은 좀처럼 쉽지 않을 전망이다.

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는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본 정부가 1억원씩 배상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는 2016년 1월 사건이 정식 재판으로 회부된 뒤 5년만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판결이 선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장 일본 정부는 남관표 주일본 한국대사를 초치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국제법 위반”이라며 “매우 유감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이 국가로서 국제법 위반을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주권면제’ 원칙에 따라 한국 측의 재판권에 복종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으며, 항소할 생각은 없다는 뜻도 전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위안부 소송이 헤이그송달협약 13조 ‘자국의 안보 또는 주권을 침해하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재판에 불참했다. 주권 면제란 주권 국가는 타국 법정에서 재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해결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국가간 약속을 이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재판부는 일본의 주권면제 주장에 대해 “반인도적 행위는 국가 면제를 적용하기 어렵다”며 “피고의 불법행위가 인정되고, 원고들은 상상하기 힘든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특히 한국 정부는 국내·외에서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 중심 접근이 결여돼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아울러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가 스스로 표명한 책임 통감과 사죄·반성의 정신에 부응하는 행보를 자발적으로 보일 것을 거듭 촉구해 왔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간의 입장차가 극명한 데다 소송 대상이 민간 기업인 강제징용 소송과 달리 이번엔 일본 정부라는 점에서 더욱 풀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뉴시스와 통화에서 “강제징용 문제는 기금을 만들면 풀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위안부 문제는 기금 자체를 거부하고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는 것인 만큼 출구 전략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며 “한일 간에 입장이 강경하고, 악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폭발성이 있다”고 밝혔다.

양 교수는 “강제징용 소송과 같이 공시 송달, 매각 명령 등을 거치겠지만 일본은 주권 면제를 주장하고 있어서 항소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한일 관계에서 과거사 문제가 지속적으로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고, 강제징용에 대해서는 몇 번의 해법을 제시했지만 일체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우려했다.

사실상 일본 정부가 항소하지 않을 경우 판결은 1심에서 확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한국 내 일본 정부의 자산이 매각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원고의 법률대리인인 김강원 변호사는 강제 집행과 자산 매각 문제에 대해선 별도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특히 한일 관계가 더욱 꼬이면서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국 정부에 부담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한·미·일 삼각 공조를 강조하고 있는 만큼 한일 관계 개선을 적극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은 한일간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키는데 적극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정부는 7월 도쿄올림픽 개최에 적극 협력하면서 강제동원 문제를 임시 봉합하는 방안을 구상해 왔지만 위안부 판결이 불거지면서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일각에선 미 국무부 부장관에 내정된 웬디 셔먼 전 국무부 정무차관이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접근을 비난했다는 점에서 향후 일본의 입장을 지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물밑에서 강제징용 문제를 타결하고 한일 관계 개선을 논의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폭탄이 터지면서 한일 관계에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가장 힘들고 곤혹스러운 것은 정부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바이든 행정부의 동아시아 외교 리더들은 한국이 다시 역사 문제를 제기해 동맹 관계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보고 있을 것”이라며 “정부가 반일 정서에 편승해서 가는 것은 실익이 없다. 미국이 우선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미국이 개입한다면 어떤 식으로 개입할지에 대해서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소식통은 “사법부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위안부 합의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라는 숙제를 안게 됐다. 2015년 위안부 협상에 대한 입장을 정확히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한일 정부는 이날 양국 대사 교체를 공식 발표했다. 외교부는 주일본대사에 강창일 전 의원을 임명했고, 일본 정부 역시 아이보시 고이치 주이스라엘 대사를 신임 주한대사로 발령했다. 양 대사는 1월 중에 현지에 부임할 예정이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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