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질병관리처 3개 부처 업무보고 자리에서 손실보상 법제화와 관련해 “중기부 등 부처와 당정이 함께 검토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손실보상 제도화 방안을 당정이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손실보상은 법제화를 통하고 세부사항은 중기부 중심으로 논의해보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마뜩찮아 하는 기획재정부를 제쳐두고 만만한 중기부에게 손실보상 법제화 총괄을 맡기는 방향으로 교통정리를 한 것이다.
재난지원금은 재정을 통해 집행되고 재정을 담당하는 부처인 경제콘트롤타워인 기획재정부 수장인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담당하는 것이 상식이고 법 규정이다.
헌법 제57조는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산을 편성해 국회에 보내는 부처는 기획재정부다. 손실보상이 이뤄지려면 국채 발행을 통한 추경이 필요하다. 국채 발행도 추경 편성도 정부 담당부처는 기재부다. 중기부에서 주도해 법안을 만들고 손실보상 피해규모, 지급 범위 등을 정하더라도 지원 금액을 정하려면 재정을 담당하는 기재부가 나서 국회와 협의해야만 하는 사안이다. 올해 4월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범위를 결정할 때도 결국에는 여야 모두의 100%지급방안에 밀려 ‘홍두사미’로 끝나긴 했지만, 홍남기 부총리가 70% 선별지급 주장을 한 것은 예산을 담당하는 장관의 권한과 역할이었다.
자영업자 손실보상의 법제화를 두고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이 “법제화를 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정세균 국무총리가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격노하고 ‘개혁저항 세력’ ‘개혁반대 세력’ ‘사필귀정’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기재부를 압박했지만 재정과 관련 의견을 내는 것은 법에 정해진 기재부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정 총리의 발언에 대해 홍 부총리가 “재정이 화수분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기획재정부 곳간 지기를 구박한다고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홍 부총리의 입장을 편들었다. 여당 대표가 보기에도 한 정부 내의 총리가 부총리를 ‘구박’하는 것으로 비친 것이다. 여권의 유력 대권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까지 나서 “재정건전성이 집단자살을 방치하고 있다”며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홍 부총리를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 차관의 발언에 대해 정세균 총리의 반응을 본 홍 부총리는 손실보상제 논의를 위한 고위 당정청회의에 감기 몸살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25일 오전 홍 부총리는 서울과 세종을 오가며 정해진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총리 여당대표를 포함한 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 3명이 격돌하는 가운데 이를 교통 정리할 곳은 현실적으로 청와대 즉 대통령 밖에 없다. 그런데 대통령이 어제 경제팀장이자 재정운용의 책임을 가진 기재부가 아니라 중기부가 다른 부처와 함께 협의하라고 했다. ‘중기부 등 부처와 함께’라고 한 대목은 대통령이 스스로 ‘경제팀장’이라고 부른 홍남기 부총리와 기획재정부의 권한과 역할을 공개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례에 드문 일이다.
홍 부총리의 처신은 앞으로 두 가지 있다. 포퓰리즘으로 치닫는 정치권에 연약한 저항 시도를 해보다가 결국에는 당청의 의견대로 결론이 나고 마지못해 따라가는 ‘홍두사미’ ‘홍백기’ 모습을 다시 한번 보이는 것이다. 홍 부총리의 원만한 성격을 감안하면 청와대와 총리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의표명은 없을 것이라는 많다.
또 다른 하나는 진짜 물러나는 것이다. 홍 부총리는 작년 11월 공개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다. 주식 양도세 과세 대상인 ‘대주주’ 여부를 판단하는 주식 보유액 기준을 3억원에서 10억원으로 올리려다가 여당의 반대로 부딪혀 무산됐을 때다. 다음날 대통령이 사의를 반려하자 “인사권자의 뜻에 맞춰 직무수행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업무에 복귀했다가 야권으로부터 ‘정치쇼’를 한다는 비난을 들은 바 있다.
이번 손실보상법 법제화 관련 논란은 주식 양도세 부과 기준완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대 사안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전에 직속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총리와 대통령에 의해 노골적으로 무시당했다. 어떤 길을 선택할지 홍 부총리의 거취가 주목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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