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원맨쇼 했다”던 노무현…임기말 참모들의 배신[최영해의 폴리코노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9일 10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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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말 청와대 참모들은 ‘받아쓰기’만
참모들의 배신, 대통령 눈 안 마주치려고 고개 숙여
김병준, “문재인 청와대 반면교사 삼아야”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07년 청와대 모습을 잊지 못한다. 대통령과 눈 맞추려고 기를 쓰던 참모들은 간데없고, 수석보좌관 회의는 마치 받아쓰기 대회를 하는 듯 참모들은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혹시 대통령이 ‘쓸데없는’ 일이라도 시킬까 참모들의 토론은 일절 없다. 정권 초 청와대가 힘 있을 때 서로 청와대로 들어오려던 공무원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 해외 파견근무를 앞 다퉈 지원했다. 대통령이 30분, 아니 50분을 혼자 떠드는 일이 일상이 됐다. 청와대는 ‘난파선’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울 삼청동 골짜기 권부(權府)의 핵심 청와대는, 아니 대통령은 위상이 하루가 달리 쪼그라들고 있었다. 배신의 현장, 청와대의 마지막 해 근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대통령 정책특보로 다시 청와대에 들어간 김병준에게 청와대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김병준 교수는 최근 자신의 유튜브(김병준TV)를 통해 노 대통령의 임기 말 청와대 모습을 생생하게 공개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12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모습. 사진 제공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12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모습. 사진 제공 청와대


##문재인은 민정, 김병준은 정책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정책 브레인이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2004년 6월부터 2년 동안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내며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 밑그림을 그리고 집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2차례, 시민사회수석을 1차례 맡았고, 노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엔 비서실장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책에는 김병준을, 민정에선 문재인을 양대 축으로 기용했다. 김병준은 노무현 정부에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과 정책실장, 교육부총리, 정책기획위원장 등 정책의 컨트롤타워였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즈음한 국면에서 국민통합 차원에서 총리로 내정된 것을 계기로 보수 야당과 가까워지게 됐다. 국민의힘 전신(前身)인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참여정부에서 같은 뿌리였던 문재인 정부와 맞서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4월 9일 청와대에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김병준 위원장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있다. 김병준은 이듬해 대통령정책실장에 임명됐다. 동아일보DB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4월 9일 청와대에서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김병준 위원장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있다. 김병준은 이듬해 대통령정책실장에 임명됐다. 동아일보DB


##김병준의 문재인 청와대 향한 쓴 소리


김병준은 노무현 청와대에서 문재인 민정수석과는 건강한 긴장관계였다. 정책과 민정 업무는 성격이 다른 독립된 파트여서 서로 부딪힐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요 부처를 총괄하면서 경제 및 사회정책을 주관한 정책실장과 대통령 친인척 및 측근 비리와 권력기관을 전담하는 민정수석 일은 성격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노무현 정부의 성공을 위해 임기 마지막까지 노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켰다. 임기 마지막 해 문재인은 비서실장을, 김병준은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최근 작심하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노무현 청와대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한 예방 주사인 셈이다. 그가 기억하는 임기 말 청와대의 모습은 진보 보수를 떠나 어느 정부에서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만하다.

2003년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 시도의회 의장단 초청 오찬에서 유인태 정무수석(오른쪽)과 김병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2003년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 시도의회 의장단 초청 오찬에서 유인태 정무수석(오른쪽)과 김병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참모의 배신, “오늘도 원맨쇼 했다”는 노무현의 푸념


2006년 교육부총리 파동으로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 김병준은 같은 해말 노 대통령의 강권으로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로 청와대에 들어왔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한 비서관은 그를 보고 “청와대에 들어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대통령 앞에서 비서들이 말을 안 합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수석보좌관 회의에 들어가 보니 정권 초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정권 초엔 서로 대통령과 눈을 맞추려 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지시 하나 더 받으려고 하던 참모들이 말기가 되자 고개를 푹 숙이고 대통령 말을 받아 적기에만 바빴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던 부산 참모 출신의 정윤재 의전비서관이 뇌물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노 대통령은 더욱 의기소침 해졌다. 노 대통령이 회의에서 30분 동안 혼자 얘기한 뒤 참모들에게 “의견을 주세요”라고 했지만 누구도 말이 없었다. 겸연쩍은 노 대통령이 20분을 더 얘기하고, 다시 10분을 말했지만 누구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결국 노 대통령은 “오늘은 그만 합시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집무실에서 김병준과 독대한 노 대통령은 그를 쳐다보며 “오늘도 원맨쇼 했네요”라고 푸념했다. “사람들이 말을 안 합니다. 미치겠어요. 나 혼자 원맨쇼 합니다.” 김병준은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떨궜다. 김병준은 회의 참석자들이 왜 얘기를 안 하는지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대통령과 눈을 마주 치면 일이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정권 초 청와대의 일과 책임은 권력이지만 말기의 청와대 일은 노동이자 짐이었던 것이다.

“일을 하다보면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애매한 것들이 많습니다. 나는 합법이라 생각하고 했는데, 나중에 불법과 탈법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권 초에는 그런 일을 해도 바로 잡을 시간이 있지만 정권 말기엔 그럴 시간도 없고, 자칫 하다간 자기 인생이 달라집니다.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 청와대에 만연합니다. 국정이 안 돌아가게 됩니다.”

2007년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사진제공 청와대
2007년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사진제공 청와대


##박연차 문제, 노 대통령은 “사람 잡지 말라” 일축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뇌물 사건은 노 대통령의 퇴임 후 비극을 초래한 대형 사건이었다. 김병준은 노 대통령이 아주 신뢰하는 인사(현재는 작고)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박연차 회장을 둘러싼 항간의 의혹에 대해 ‘문제가 있는 사안’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노 대통령에게 진언(盡言)하기로 했다. 이후 그는 노 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박연차 회장 문제를 거론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런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병준은 “저는 사실이 맞는 것 같다”고 하자, 노 대통령은 “떠도는 얘기 듣고 사람 잡지 마라”며 불쾌감을 보였다는 게 김병준의 회고다. 대통령의 반응에 당황한 김병준은 대통령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박연차 회장 얘기를 해선 안 될 것 같다”며 접기로 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퇴임 후 검찰이 박연차 회장을 수사하고 뇌물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불행한 선택을 했다. 김병준은 “눈앞이 깜깜했다. 대통령에 대한 정보보고 라인이 이렇게 망가졌나 싶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대통령이 듣기 싫어하는 정보는 거른 채 잘못된 정보가 대통령에게 입력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 12월 정부 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공통혁신과제 토론회에 참석한 전윤철 감사원장 문재인 민정수석 김병준 정책실장(오른쪽부터)이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5년 12월 정부 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공통혁신과제 토론회에 참석한 전윤철 감사원장 문재인 민정수석 김병준 정책실장(오른쪽부터)이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합치면 정동영 이긴다”


2007년 민주당의 대선 구도가 정동영 후보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을 때다. 김병준이 이런 판세를 보고하자, 노 대통령은 “이해찬과 한명숙 유시민이 합치면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청와대의 바람일 뿐 이미 정동영으로 판세는 기울어 있었다. 김병준은 “1+1+1=3이 아니라 1.3밖에 안 된다. 정동영은 1.5 수준이다”고 반박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정치도, 선거도 안 해본 사람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심하게 타박했다. 노 대통령은 왜곡된 정보에 둘러싸여 있었다.

“청와대에서의 정보 왜곡은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임기 말이 될수록 대통령의 심기 관리를 위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언론에선 대통령에게 쓴 소리, 바른 소리 하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얘기는 친구와 술 마시면서 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대통령 면전에서 하기는 정말 어렵다. 임기 말이 되면 참모들은 대통령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정권이 끝나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된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보다 박연차 회장이 더 실세였던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지금 가진 정보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열린 마음으로 얘기를 들어야 한다.”

김병준의 진단이다. 자녀 입학비리 등 조국 사태와 윤석렬 검찰총장 찍어내기, 일련의 ‘검찰 개혁’ 과정에서 지금 청와대의 정보 흐름은 어떤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병들지 않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진실을 말해 줄 수 있는 현자(賢者)를 찾는 것이 임기 말 대통령의 책무라고 김병준은 강조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문재인 비서실장(왼쪽)과 김병준 정책특보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문재인 비서실장(왼쪽)과 김병준 정책특보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실세 총리, 실세 장관은 없다


김병준은 “언론에서 ‘실세 총리’라고 부르지만 다 청와대와 먼저 상의한다. 많은 장관들이 청와대 수석과 상의하고 비서관, 심지어 행정관에게 보고하기도 한다. 청와대는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어떨까? 김병준의 평가는 냉정했다.

“4월 보선이 끝나면 바로 대선 국면입니다. 대통령은 답답할 것입니다. 앞 정부 공무원들을 적폐로 몰아놓고 인사 처리를 했습니다. 이들을 좌천시키고 사표를 내게 했죠. 합법과 탈법의 경계에 있는 것들을 적폐로 규정하고 처단했습니다. 다음 정부엔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요? 설령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대통령이 바뀌면 과거 청산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정치는 정당이 집권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 집권하는 시스템입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다 물갈이 될 것입니다. 야권과 시민사회의 요구가 빗발치면서 또 다른 적폐청산 작업이 벌어질 것입니다.”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개편된 대통령비서실에 새로 임명된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집무실에서 환담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개편된 대통령비서실에 새로 임명된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집무실에서 환담하고 있다. 동아일보DB


##4월 보선 끝나면 청와대 레임덕?
노무현 청와대 후반기를 함께 했던 청와대의 모습을 문재인 대통령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청와대에서 일어난 일 하나하나를 수첩에 기록했을지 모른다. 그는 2007년 3월부터 대통령 임기가 끝난 2008년 2월까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김병준이 기억하는 임기 마지막 해 청와대 근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검찰의 원전 수사로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구속 위기까지 치닫고, 박범계 법무장관의 독단적 검찰 인사로 신현수 민정수석의 사표 파동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4월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끝나면 본격 대선전으로 진입한다. 국민의 관심은 이제 차기 대선 주자에 급속히 쏠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참여정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병준의 고언(苦言)을 문재인 청와대 사람들은 흘려듣지 말아야 할 때인 것 같다.

2006년 7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병준 교육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뭔가 지시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6년 7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병준 교육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뭔가 지시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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