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국가정보원 불법사찰’ 논란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여당이 ‘이명박 정부 국정원 사찰’ 문제를 띄우자, 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국정원 사찰’을 꺼내며 맞불을 놨다.
정치권은 이번 논란이 보궐선거를 넘어 내년도 대통령선거까지 파장을 미치는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의혹은 이미 역대 보수정권과 진보정권까지 뻗어있지만, 실제 사찰 정보를 공개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때문에 ‘뚜껑’은 열지 못한 채 의혹과 공방만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與 ‘MB 국정원 사찰’ 파상공세…“반드시 밝힌다”
19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정보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지난 16일 ‘국가정보기관의 사찰성 정보 공개 촉구 및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다.
사찰 피해자에 대한 국정원 사찰 정보를 공개·폐기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내용이 핵심이다. 결의안 공동 발의자 명단엔 이낙연 대표, 김태년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 총 52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번 결의안은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시민단체 ‘내놔라 내파일’ 청구를 받아들여 국정원의 사찰성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면서 촉발됐다. 특히 18대 국회의원 전원을 비롯해 정관계, 재계, 문화예술계 인사를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사찰이 이뤄졌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여당은 과거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이 폭넓은 불법사찰을 진행했다며 파상공세를 시작했다. 이낙연 대표는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반드시 진상을 밝혀야겠다. 오래전 일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덮어놓고 갈 수 없는 중대범죄”라고 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도 “민주당은 국회 정보위원회 의결을 통한 불법사찰 자료 열람 등 국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상을 반드시 밝혀낼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내 일부 의원은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형준 국민의힘 예비후보를 압박했다.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인 정태호 의원은 지난 17일 BBS 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박형준 예비후보가 그 당시(MB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이라며 “당시에 정무수석이었으니 본인의 이런 내용도 스스로 밝혀야 한다”고 했다.
◇野 “DJ정부 국정원, 1800명 사찰”…맞불
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국정원 불법사찰이 자행됐다”며 역공에 나섰다. 박민식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는 지난 1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대중 정부 때 역대 국가정보원 사상 가장 조직적으로 불법도청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은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고위공직자, 시민단체 간부 등 1800명의 통화를 도청했다. “DJ(김대중) 정부에서는 불법 사찰이 없었다”고 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을 직격한 셈이다.
박 후보는 지난 2004년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의 주임검사를 맡아 DJ정부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을 구속기소 한 검찰 ‘특수통’ 출신이다. 그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당시 국정원은 여야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고위공직자, 시민단체 및 노조 간부 등 사회지도층 인사 약 1800명의 통화를 무차별 도청했다”고 했다.
이어 Δ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 통화 Δ민주당 소장파 의원들 통화 Δ햇볕정책 반대자들 통화 Δ김대중 대통령 처조카 보물섬 인양사업관련 통화 Δ한나라당 의원과 통화한 중앙·연합뉴스 기자 통화 Δ동아일보 사장의 정부비판 기사 논조 통화 등 9건의 당시 국정원 불법도청 내역도 함께 공개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 17일 KB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노무현 정부에도 (국정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며 “노무현 정부 때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민정수석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 의원은 “당시 민정수석실에서 이런 걸 하지 말라고 한 지시가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며 “대통령이 답변해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문 대통령이 국정원 사찰에 개입했거나 이를 묵인했다면 현 정권의 레임덕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사찰 문건, 판도라 상자 될 수도”…대선까지 파장 미치나
전문가들은 ‘국정원 사찰 논란’이 여야 모두에 직간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특별법 제정이 장기화하는 동안 ‘정치 공방’만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국정원 불법사찰 논란은 검찰개혁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라며 “먼저 문제를 제기한 집권당이 ‘판도라의 상자’의 열쇠를 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여당이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불법사찰 논란을 꺼내면 야당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사찰을 문제 삼는 것이 당연하다”며 “선거 때문에 (일부 정보를) 묻어버리거나, 공개 시점을 미룬다면 ‘인권문제를 정치에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사찰 정보가 세상에 공개되는 시점은 미지수다. 내밀한 개인정보가 밀접하게 얽힌 사안이어서 특별법 제정이나 자료취합 과정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김병기 의원은 지난 17일 “일단 국정원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불법 사찰) 자료를 취합해야 한다. 취합 전에는 저희가 의결해도 (정보위에) 제출할 방법이 없다”며 “한두 달 사이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도 “국정원 사찰 정보는 개인정보에 해당하기 때문에 국정원이 자의로 공개하거나 폐기할 수 없다”며 “그래서 박지원 국정원장도 ‘국정원 60년 불법사찰의 흑역사’라며 국회에 특별법 입법화를 요청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지만 사찰 정보 안에는 대북정보, 국가기밀 등 정보기관의 정상업무부터 제3자 정보, 내밀한 개인정보, 사실관계가 모호한 소문 등 여러 정보가 뒤섞여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합의하는데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