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 속 갈등의 한미 동맹 |
1. 변화하는 한미 동맹 한미 양국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이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법적인 동맹의 틀이 마련됐다. 통상 공동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동맹이 맺어진 뒤 제3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데 한미는 먼저 공동의 적과 함께 싸운 뒤 동맹을 결성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미 동맹은 지금까지 굳건히 지속되고 있지만 동맹이 지속되는 동안 주변 전략적 환경 변화 등에 따라 상호의 역할과 위상, 기대와 필요성 등에 변화가 있었다. 양국간에는 이런 변화에 맞게 서로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이견과 갈등도 종종 나타났다. 최근 한미 동맹의 정체성 변화를 일으키는 전략적 환경 변화로는 첫째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적 지형 혹은 안보 정세가 미소 냉전 구도에서 미중 패권 경쟁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미국이 중국과 전략적 패권 경쟁을 벌이면서 동맹국 한국에 대한 요구가 한국의 전략적 이익과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양국 관계의 변수가 될 수 있다. 둘째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불과 수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이제 사실상 핵 보유국으로 미국을 상대로 블러핑(bluffing)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북핵 능력 고도화는 그 자체가 주는 위협도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한미의 접근이 다를 수 있어 한미 동맹 관계에도 파급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에 방점을 두는 문재인 정부와 북한 비핵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조 바이든 정부와의 엇박자가 우려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셋째는 한국과 미국 양국 모두 내부적으로 상대국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한국에 대한 급격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전략 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는 비용을 분담하는 항목에 추가하려고 했다. 이는 사업가 출신의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을 돈으로 계산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6·25 직후처럼 미국이 안보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한국을 인식하기보다 상호적인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세계 10위권 경제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안보 우산을 제공하는 만큼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는 등 안보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의식이 커진 것이다. 한국의 미국에 대한 인식도 안보를 제공하는 동맹국이지만 부정적인 영향은 없었는지, 나아가 앞으로 한중 관계, 남북 관계 등에서 한미 관계가 장애 요소가 되지는 않는 지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양국간의 인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적절한 변화, 동맹 관계의 진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찰과 갈등이 불거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70여년 동안에도 크고 작은 이견과 갈등이 있었다. 밀월과 우호의 기조 속에서 나타났던 마찰과 갈등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한미 동맹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 미국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쓴 맛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2. 이견과 갈등의 역사 ▷한미동맹조약 체결 진통: 에버레디 계획과 반공포로 석방 한미 관계의 첫 시련은 동맹 조약을 맺기 전 찾아왔다. 6·25 전쟁의 휴전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행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구금하는 것을 포함한 ‘에버레디 계획’을 세우고, 이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1950년 6월 전쟁이 발생한 이듬해 초 전황은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고착되고 지루한 고지전 소모전으로 돌입했다. 미국은 그해 3월경부터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휴전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소련도 미국과의 비밀 접촉 등을 통해 휴전에 긍정적으로 나섰다. 1951년 7월 10일 1차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시작됐다. 휴전 회담은 군사분계선 설정을 두고 38선 복귀를 고집하는 공산측과 현 대치 전선을 내세운 유엔군측 주장이 다르고, 전쟁 포로 처리도 포로 전체의 강제 송환을 주장하는 공산군과 포로 개인 의사를 존중, 자유 송환을 주장하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맞섰다. 휴전 회담이 시작된 지 2년 가량 진전을 보지 못하다 1953년 들어 급진전됐다. 그해 1월 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취임하고 소련에서는 3월 휴전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한 것도 큰 계기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토 통일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휴전하는 것에 반대했다. 중공군이 철수하지 않는 상황에서 휴전이 이뤄지면 한국에는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휴전 협정이 진전되면서 압박이 강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되 중공군 철수, 휴전 협정 체결 전 한미안보조약 체결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단독 북진을 감행하거나 유엔군사령부에 넘겨 준 작전통제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 지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맞섰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말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 질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 1953년 5월 ‘에버레디 계획(상시대비 계획)’을 마련했다. 한국군이 유엔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거나 혹은 유엔군에 공공연히 적대행위를 할 때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선언한 뒤 주요 군사 및 민간 지도자를 체포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체포 대상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승만 제거 계획’으로도 불렸다. 6월 8일 포로 교환 협정이 서명되는 등 휴전 협정이 급진전되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18일과 19일 이틀간 전국 7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당시 한국에는 약 3만5000여명의 반공 포로가 7개 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는데 관리는 미군이 담당하지만 경비 병력의 대다수는 한국군이었다. 이틀간 2만7389명의 반공 포로가 헌병총사령부의 지휘에 따라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하에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전체 수용자의 76.7%를 차지했다. 탈출 후 931명은 체포됐고, 미군 기지 내에 있던 부평지구 제10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던 포로들은 미군 경비병의 기관총과 소총 사격으로 61명이 사망했다. 포로 분류에서 친공(親共) 포로는 거제도에 남아있었는데 거제 수용소는 석방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같은 진통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서명된 뒤 그해 10월 1일 한미 동맹의 초석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됐다. ▷‘닉슨 독트린’과 박정희 정부의 자주 국방 참전 명분을 두고 논란이 많은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해 한미 양국 동맹은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960년대 말 한미 양국간에 ‘안보 디커플링’ 현상이 나타났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후 미국 해군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1월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으로 남북 긴장이 고조됐다. 하지만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무력 도발과 충돌에 대해 국지적인 사안으로 치부하고 심각성을 느끼지 않거나 주요 관심사로 두지 않았다. 한국이 느끼는 안보 불안에 비해 미국은 대수롭지 않게 느끼는 ‘안보 인지 감수성’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이 깊어지면서 반전 분위기가 높아지자 베트남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점차 발을 빼려는 정책 수정 움직임이 나타났다.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군사적 조치 등 강경 대응보다 협상으로 타결지으려 했던 것도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 한반도에서 군사적 행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1968년 11월 당선된 닉슨 대통령은 이듬해인 1969년 7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핵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스스로 방어해야 하는 일차적 책임이 있으며 미국은 베트남 전쟁처럼 휘말리는 정책은 피하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줄이고 자주 국방을 강조한 것은 이같은 한미 동맹을 둘러싼 안보 환경 변화에 배경을 두고 있다. 1970년대 초 남북한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중국과 ‘핑퐁 외교’ 등 데탕트 국면으로 전환했다. 남북간에도 제한적인 수준에서 남북 대화가 진행됐지만 1970년대 미중 화해가 남북 대치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를 당황하게 했다. 미-중간 전략적 구도에 따라 한반도에 직격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과거는 미-중 화해, 지금은 미-중 갈등이 남북 관계 설정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점이 다르다. ▷ 1970년대, 한미 ‘핵과 인권’ 갈등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주기적인 주한 미군 철수 방침 발표 및 실제 1개 사단 철수 등의 상황을 맞아 한국군 현대화 및 자주국방을 추진했다. 강대국과 약소국이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약소국이 독자적인 방위력 강화에 나서는 것은 강대국 동맹국에 대한 불신 불만을 반영한 것이자 동맹 이탈의 전조일 수도 있다. 더욱이 약소국이 핵무기 개발까지 나선다는 것은 동맹의 신뢰에 관계되는 것이자 핵 비확산 체제 유지와도 관련이 있어 사안은 더 엄중해진다.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한 것은 1970년 3월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가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통보하면서부터다. 안보 동맹국으로서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미 동맹 갈등사’ 163쪽). 1974년 5월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핵확산 위협에 관심을 높이고 핵개발 국가를 비밀리에 조사했는데 그해 11월 한국의 핵개발 의도를 뒤늦게 파악했다. 미국은 한국이 원자로를 구입한 캐나다와 접촉해 한국의 원전 재처리 시설 보유 방지에 나섰다. 제럴드 포드 정부는 유사시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해 안보 불안을 줄이고 비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장비와 연료를 공급하는 강온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은 박정희 정부는 결국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기술 도입도 포기해 핵개발의 길을 가는 것을 중단했다.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고 미국은 저지하려한데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등 안보 불안이 높아졌지만 미국은 포드에 이어 지미 카터 정부에서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카터 정부는 유신체제하의 한국의 인권 상황에 더 주목했다. 1979년 6월 정상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 폐지와 가능한 많은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한 것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한미 동맹을 덜컹거리게 한 두 키워드는 ‘핵과 인권’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의 전면 철수 압박까지 가하면서 한미 동맹은 최악의 시기라는 평가가 나왔다. ▷ ‘햇볕정책’과 ‘악의 축’ 동맹의 기초는 제3의 적과 위협에 대한 공통된 인식과 대응에 기반을 두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조지 부시 정부의 ‘악의 축’ 규정은 대북 대응에서의 ‘디 커플링’을 일으켰다. 햇볕정책은 북한 체제가 가진 안보 불안을 줄이거나 해소시켜 줌으로써 핵개발 등의 현안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분단 후 첫 남북정상회담인 2000년 6·15 회담을 적극 지지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교차 방문 등이 이뤄졌다. 하지만 2000년 1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클린턴의 대북 유화정책 정책에서 선회했다. 이듬해 9·11 테러가 발생한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 국가로 규정하면서 ‘테러와의 전쟁’ 대상인 불량 국가로 지목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면 동맹의 기조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부시 정부 시절인 2003년 6월 경기 의정부시에서 발생한 주한 미군 병사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은 반미 감정에 불을 지폈고, 불평등한 한미주둔군 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촉발했다. 여론 조사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보다 비호감이 높게 나타나고, 주한 미군 감축 여론이 더 높게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국가로 북한보다 미국이 높다고 응답해 한미 동맹 혹은 혈맹이라는 말이 무색한 지경이 됐다. ▷ 정체성 조정 필요한 한미 동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싱가포르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대북 관계에서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양국 관계가 삐걱대는 것으로 인식하게 한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바이든 정부 들어 바로 타결됐다. 하지만 한미 동맹의 정체성 변화를 일으키는 전략적 환경 변화가 곳곳에서 뇌관으로 작용해 한미 관계를 흔들 수 있다.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는 미-중 갈등 속에 한미 동맹이 점점 더 깊게 휘말려 들어가는 경우 한미 동맹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커질 수 있다. 한국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이어 미국 호주 일본 인도의 협의체인 쿼드(QUAD) 등 미중 사이에서 선택의 압박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하는 가운데 대북 관계 설정을 두고 한미 간에 이견과 갈등이 지속될 수 있다. 남북 관계 개선에 중점을 두는 문재인 정부와 북한 비핵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의 엇박자가 우려되고 있다. ‘햇별정책’과 ‘악의 축’ 시대와는 성격이 차이가 있지만 남북 관계에 대한 한미 간 인식이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다른 버전으로 나타날 수 있다. 미중 갈등이나 북한 변수 못지않게 한미 동맹의 정체성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로는 미국이 한미 동맹 혹은 주한 미군의 용도를 한반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된다. 즉, 한미 동맹이 처음 출발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공동의 결의를 나타낸 것이지만 이제는 글로벌 차원의 안보 동맹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2003년부터 적용하는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GPR)’에 따라 주한 미군은 대북 방어만이 아닌 글로벌 차원에서 활동하는 기동군 개념이 됐다. 두 차례의 이라크 파병에서 확인된 것처럼 한미 동맹속 한국군의 활동 반경도 해외로 확대되고 있다. 달라지는 한미 동맹의 위상과 역할, 정체성에 대해 양국 정부나 국민들이 충분히 합의하지 못하거나 속도를 맞추지 못할 경우 언제든 갈등이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참고 문헌 황수현, 『한미 동맹 갈등사』, 한국학술정보(주), 2011. 차상철, 『한미 동맹 50년』, 생각의 나무, 2004. 남시욱, 『한미 동맹의 탄생 비화』, 청미디어, 2020. 정욱식, 『동맹의 덫』, 삼인, 2005. 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 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김보영, ‘한국 전쟁 시기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 교섭’ 『이화사학연구』, 38권, 2009. 이남규, ‘1953년 이승만의 세계 대전! 반공포로 석방 왜?’ 『월간조선』2003년 7월호 권말 부록.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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