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죽여 나라와 국민을 살리려는 살신구국(殺身救國)의 역사적 소명의식에 투철한 사람이 정치인이 돼 국가를 맡아야 한다.”
격동의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여야를 아우르며 소통과 통합을 추구했던 대표적인 정치 원로인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2018년 발간한 회고록 ‘정치는 중업(重業)이다’를 통해 남긴 글이다. 이 전 총리는 정치적 조언을 구하러 찾아온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항상 자신의 정치색을 따지기에 앞서 국민의 마음부터 읽으라”고 당부했다. 총리, 장관, 정당 대표 등을 지낸 이 전 총리는 한국 현대사에 남을 여정에 8일 마침표를 찍었다. 향년 87세.
○ 판사, 검사 거쳐 6선 정치인으로
고인은 1934년 경기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에서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이 전 총리는 경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군 복무 중인 1958년 고등고시 사법과(사법시험)에 합격했고, 군 법무관으로 제대한 뒤 서울지법에서 판사로 일했다. 이후 변호사를 거쳐 검찰로 옮긴 뒤 서울·부산·대전지검에서 일했다. 훗날 고인은 총리 재임 시절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판사, 검사, 변호사를 다 해보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사명감이 투철하고 열정적이던 시절”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전 총리는 검사장 진급을 앞두고 정계 입문 권유를 받고 “고향이 나를 부르고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한다면 험난하더라도 그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며 정치인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1981년 고향인 포천에서 11대 국회의원이 된 고인은 16대까지 내리 6선을 지냈다.
○ ‘통합과 대화’ 강조한 정치 일생
고인은 국회에서 여야 협상을 맡는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만 세 차례 지냈다. 1987년 6·29선언과 직선제 개헌, 1990년 5공 비리 청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1993년부터 시작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개혁 입법 등의 과정마다 고인은 원내총무로 활약했다. 난마처럼 복잡하게 얽힌 어려운 협상에서도 대화를 통해 타협을 이끌어내 ‘이한동 총무학’이라는 말이 생겼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고인의 원내총무 시절에 대해 “수많은 악법들이 민주적인 법으로 바뀌었다. 입법사(史)에 남을 큰일을 했다”고 평가했다.
1995년 국회부의장으로 일할 때는 여당의 정당 공천제 폐지 법안 처리를 막으려는 야당 의원들이 8일 동안 고인의 집을 점거하는 일도 벌어졌다.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9일 조문 뒤 “점거하러 온 야당 의원들에게 술상을 차려줬던 멋있는 분이었다”며 “정치라는 건 서로 타협하고 협치해야 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고인은 생전 당시 상황을 두고 “그동안의 총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최악의 협상 결과도 가장 매끄럽게 처리된 최선의 날치기보다 낫다”고 회고했다.
오랫동안 ‘준비된 대통령’ 후보로 꼽혔던 고인은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1999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맡았던 고인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김대중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 입법·행정·사법부를 모두 거쳤던 고인은 생전 회고록에서 “정치권력이란 스스로 아름다운 멍에를 지는 일”이라며 “멍에를 짊어진 소는 늘 주인(국민)을 위해 땀 흘려야 하고, 그 직을 그만둔 뒤에도 무한 봉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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