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반대에 밀려 다른 택지 찾기로
태릉 골프장 등 개발도 지역 반발
아파트 공급대책 차질빚을 가능성
당정이 지난해 8·4 공급대책의 일환으로 정부과천청사 유휴부지에 주택 4000채를 지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과천 내 다른 지역을 찾기로 했다. 경기 과천시 시민들의 반대로 정부 공급대책이 바뀌면서 주민 반발이 심한 수도권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업 진행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과 국토교통부, 과천시는 4일 국회에서 당정 협의를 열고 과천시의 계획 수정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정은 과천청사 부지 대신 과천지구 내에 3000채를, 다른 지역에 1300채를 지어 총 4300채를 짓기로 했다. 또 공급대책에 포함된 다른 지역도 △양호한 입지 △정부 계획보다 많은 물량 △지방자치단체 적극 협조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계획 변경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당정이 과천 내 다른 부지를 찾자고 결정한 건 지역 주민들의 강한 반발 때문이다. 정부는 세종시 이전에 따라 정부과천청사 일대 유휴부지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밝혔지만 과천 시민들은 아파트가 아닌 공원 등 주민 편의시설 건립을 요구했다. 지역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은 결국 김종천 과천시장을 대상으로 한 주민소환투표 성사로까지 이어졌다. 이달 말 또는 다음 달 초 실시되는 소환투표를 앞두고 결국 당정은 대상 부지 변경으로 선회했다.
수도권에서 정부 공급계획이 지자체와 주민 반발에 밀려 취소되는 첫 사례가 나오면서 반대 여론이 높은 다른 개발 예상 지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문재인 정부 임기 말 부동산정책의 핵심인 대규모 공급이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정부는 서울 노원구 태릉 골프장과 서초구 서울지방조달청·국립외교원 부지, 마포구 서부면허시험장 및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DMC) 부지 등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했지만 지역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과천은 그나마 대체 부지를 물색해 예정됐던 공급 물량을 맞출 수 있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다른 지역은 사업 진행이 느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주민협의 안 거친 ‘과천 4000채’ 전면 수정… 태릉-용산도 난항
불안한 수도권 주택공급정책
정부과천청사 유휴부지에 주택 4000채를 공급하기로 했던 정부 계획이 사실상 무산됐다. 주택 공급대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공급계획에 차질을 빚게 됐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집값을 잡으려고 설익은 공급대책을 쏟아낸 뒤 주민 반발로 사업이 지연되거나 전면 수정되는 일이 반복되면 주택 공급정책에 대한 신뢰가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 정부 땅이라고 주민협의 생략
정부과천청사 유휴지 공급이 무산된 것은 이해관계가 복잡한 도심 택지의 특성을 정부가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당초 정부는 공공택지 공급계획을 내놓을 때 주민과 지방자치단체 간 협의 단계를 거의 거치지 않았다. 정부나 정부 산하 공공기관이 소유한 땅이기 때문에 협의가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일방적인 발표가 나온 직후부터 주민과 지자체의 반발이 빗발쳤다. 여당 소속 지자체장이나 국회의원까지 “사전 협의가 없었다”며 각을 세우기도 했다.
지자체와 정부 부처에 따르면 지난해 5·6공급대책과 8·4공급대책 발표 이후 관할 지자체나 주민들이 반대 의사를 표시한 도심 택지는 정부과천청사 외에도 태릉골프장(1만 채), 용산역 정비창(1만 채), 서부면허시험장(3500채) 등 3만여 채에 이른다. 국토부 관계자는 이날 “(주민 반발이 있는) 다른 택지의 경우에도 과천처럼 계획을 변경하거나 대체할 땅을 찾는 등 조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애초에 발표된 계획 자체가 장밋빛 청사진에 그친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과천에서 대체 용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과천청사의 경우 과천시가 대체 용지를 제시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국토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벌써부터 일부 과천 주민은 “과천지구 자족용지를 택지로 전환하는 방법은 손 대신 발을 내주는 것”이라며 “주택 공급계획 자체를 취소해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대체 계획에도 주민들이 반발한다면 공급 시기는 더 지연될 수밖에 없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물량 채우기에 급급해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부작용은 예견됐다”며 “공급대책 전반에 대한 신뢰가 저하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서울 도심 복합 개발도 지연 우려 커져
수도권의 다른 지역으로 주민 반발이 확산될 여지도 있다. 당장 5일 오후 노원구 롯데백화점 앞에서 태릉골프장 반대 집회가 열린다. 노원구의 한 주민은 “애초에 인근 주민들 의사는 고려하지 않고 발표했다가 반발이 커지면 취소하는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주민은 “이렇게 취소, 변경할 수 있다면 태릉골프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아울러 정부는 올 2·4공급대책에서 역세권, 저층주거지 등 도심 개발로 전국에 주택 20만6000채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주민 반발이나 지자체 반대 등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예정지구 지정에는 주민 10%의 동의만 받으면 된다. 현재까지 6만 채 규모의 후보지가 발표돼 1만9000채 이상이 예정지구 지정 요건을 충족했다.
하지만 예정지구 지정 뒤 1년 이내에 주민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지 못하면 사업은 자동 취소된다. 사유지인 만큼 공공이 소유한 유휴부지에서는 거치지 않아도 되는 토지수용, 보상 과정까지 거쳐야 한다. 결국 실제 착공, 분양까지는 토지주 전체가 사업에 동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도 수차례 “주민 동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가 지난해 공공주택지구로 지정한 영등포 쪽방촌의 경우 주민 협의에만 1년 가까이 걸렸다. 지금도 일부 주민은 사업을 반대하고 있다. 2·4대책과 별도로 발표된 서울역 쪽방촌 개발사업의 경우 일부 토지주가 민간 개발을 주장하며 5개월째 주민 협의만 진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공이 공급을 전담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민간 공급 규제를 푸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더 이상 중앙정부의 일방통행식 공급이 먹히지 않는다”며 “주택 공급을 공공과 민간, 중앙과 지방이 나눠서 한다는 생각을 갖고 규제 완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 /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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