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 초래 軍인권-안보 위해 바로잡을 것”
성추행 피해 女중사 추모소 찾아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
철저 조사-병영문화 개혁 지시
文 “병영문화 폐습 송구”… 靑, 전수조사 검토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인 6일 성추행 피해를 호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모 중사 사건을 “병영문화의 폐습”으로 규정하고 “국민들께 매우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사과했다. 청와대 내부에선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 내 성추행 실태 등 병영문화 전수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군 내부에서 사건을 은폐 축소하면서 곪아온 병영 폐습이 임계점을 넘은 만큼 강도 높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66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최근 군 내 부실급식 사례들과, 아직도 일부 남아 있어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낳은 병영문화의 폐습에 대해 국민들께 매우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 장병들의 인권뿐 아니라 사기와 국가 안보를 위해서도 반드시 (폐습을) 바로잡겠다”며 “나는 우리 군 스스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변화하고 혁신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추념식 직후 이 중사 추모소가 마련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을 찾아 유족에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동행한 서욱 국방부 장관에게는 “철저한 조사뿐 아니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병영문화가 달라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성추행 등 폐습과 관련한 병영문화 전수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성추행 등 범죄에까지 왜곡된 상명하복 잣대를 들이대 부대 내 사건 사고를 축소 은폐하는 폐쇄적인 문화 탓에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 비율이 7.4%인 여군을 동료로 인식하지 않는 남성 중심적 문화가 만연한 것도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 이 중사에 대한 성추행이 벌어진 공군 20전투비행단에선 2018년과 지난해에도 부대 대대장(중령)이 여군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부대는 물론이고 공군 차원의 재발 방지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부에서 “가해자가 운이 나빴다”는 발언이 나오는 등 2차 가해로 이어졌다.
사건 발생 뒤 가해자를 비롯해 부대 관계자의 회유, 협박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면서 비밀 유지와 피해자-가해자 분리, 신고 방해 금지가 명시된 군의 ‘부대관리훈령’도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신고를 포기하는 장병도 상당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대 내 성폭력 고충이 공정한 절차에 따라 처리되고 있다’고 답한 여군 비율은 48.9%로 2012년 실태조사(75.8%) 때보다 크게 줄었다. 군은 2015년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오히려 군의 조치를 불신하는 장병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군 당국자는 “군 내 일탈과 범죄를 서로 숨겨주거나 무마하고, ‘제 식구 감싸기’식 처벌로 일관하는 한 병영 폐습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군 11% 성희롱 피해… “신고한들 진급 불이익-따돌림만” 눈물
[軍 성범죄 파문]‘병영문화 폐습’ 대체 어떻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성추행 피해를 호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 사건을 사과하고 “병영문화의 폐습”이라고 규정한 것은 군 통수권자로서 반인권적이고 후진적인 군 문화를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로 풀이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민의 분노가 크고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이라며 “이번에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재발방지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 대통령이 연일 강력한 메시지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군 안팎에선 여군과 병사 등 군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폭력적 억압 등 갖은 병영폐습이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지휘체계를 악용한 성폭력과 폭행·가혹행위 등이 갈수록 늘어나는 데다 사건이 발생해도 회유와 무마를 통해 축소, 은폐하려는 군의 고질적 악습이 도를 넘고 있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 성폭행 등 병영폭력 실태 갈수록 악화
이 중사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여군 대상 성폭력 사건의 심각성이 특히 두드러진다. 공군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뿐 아니라 해군과 육군에서 각각 2017년, 2013년에 성추행을 당한 여군 간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년 주기로 발간하는 국방부의 2019년 군 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여군 간부 설문 대상자 중 11.4%가 조사시점 기준 1년간 성희롱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조사 때 8.4%보다 늘어났다. 군 외부의 시민단체인 군인권센터에 지난해 접수된 군내 성폭력 건수(16건)도 2019년(3건)보다 5배 넘게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군 인권센터는 장난을 빙자한 추행(엉덩이 치기, 주무르기 등) 대신 보다 직접적 성폭력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군내 폭행 및 가혹행위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군사법원이 지난해 10월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에게 제출한 군내 폭행 가혹행위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6∼2020년 6월까지 총 4275건이 발생했다. 2011∼2015년 6월까지의 발생 건수(3643건)에 비해 600여 건이 증가한 수치다. 올해 1월 축구를 하던 중 공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간부에게 무릎을 가격당해 슬개골 골절상을 입은 육군 22사단 병사는 “가해자가 ‘남자답게 해결하자’고 압박하거나 행정보급관이 신고를 막았다”고 말했다. 2014년 상습 구타와 가혹행위로 인한 ‘윤 일병 사망 사건’이 발생한 뒤 군은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를 발족해 병영문화 쇄신과 복무환경 개선책을 발표했지만 ‘공염불’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 계급·진급 악용한 ‘폐쇄적 카르텔’이 주범
각종 병영 폐습이 뿌리 뽑히지 않는 주된 요인으로 ‘계급’을 악용하고 진급을 ‘미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는 군내 ‘폐쇄적 카르텔’이 지목된다. 군 관계자는 “철저한 대책과 매뉴얼을 만들어도 사건 사고가 나면 출신별 지휘관계를 앞세워 ‘조직 보호’를 명분으로 쉬쉬하고 방관하는 군내 부조리 문화가 병영폐습을 악순환시키는 주범”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중사 사건은 8년 전 상관의 성추행과 협박, 가혹행위 등에 10개월간 시달리다 약혼자를 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오모 여군 대위 사건의 ‘재판(再版)’이라는 지적이 많다. 당시에도 오 대위 주변에는 가해자의 횡포를 인지한 이들이 있었지만 관련 수사는 오 대위의 유서가 발견된 뒤에야 시작됐다. 조직적인 축소·은폐 의혹도 제기됐다. 일선 부대의 한 위관급 여군 장교는 “성추행 피해를 신고해봐야 진급 등에서 불이익과 부대 내 따돌림을 당할 텐데 그냥 운이 나빴다면서 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국방부의 2019년 군 성폭력 실태조사에서도 피해 경험을 신고한 비율은 32.7%에 그쳤다. 미신고 응답자들의 44%가 ‘아무 조치도 취해질 것 같지 않았다’고 답했다. 성폭력 사건 발생 때마다 군이 발표하는 가해자 엄정처벌 등 뒷북 대책이 거의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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