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연설은 지지자들 환호를 뿜어 올릴 ‘열 덩어리’는 아니었다. 검사가 국민 앞에 설 일은 거의 없다. 그러한 베일 덕분에 윤 전 총장의 카리스마가 커진 측면도 있다. 검사는 피고 측과 싸워야 하니 공소장에 모든 것을 다 담지 않는다. 검사 출신인 윤 전 총장도 연설에서 그러한 속성을 내비쳤다. 다의적(多義的)이지 않고 적확한 용어를 쓴 공소장 같은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정시(正視)하지 못하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모습과 간투사를 많이 넣은 그의 방어적 태도는 ‘강골’을 기대한 이에겐 실망스러웠다. 총장 시절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징계를 시도했을 때도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전혀 고치지 못했다. 보수세력 일각에선 그가 ‘경제공동체’ ‘묵시적 청탁’ 개념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적용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도 대안이 없어 윤 전 총장을 ‘비판적 지지(비지·批支)’하게 됐다는 점을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서 애처가를 자처했지만 처가의 모든 것이 발가벗겨질 수 있다는 부담도 안고 있다.
그렇기에 최재형 씨가 하루 먼저 감사원장직에서 사퇴한 것은 보수세력에겐 희망일 수 있다. 진보 좌파의 공격을 분산하고 ‘보수 우파의 판’을 키우면서 윤 전 총장의 대안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대권 레이스의 페이스메이커라는 뜻인데, 마라톤에서는 페이스메이커가 우승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윤석열 비지세력이 대거 최 전 원장 지지로 선회할 수 있기에 단순한 페이스메이커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윤석열 批支세력이 바탕
짧은 기간 페이스메이커를 하다 물러나면 ‘캐도 캐도 미담뿐’이라는 인생 스토리는 물론, 그의 모든 것이 와해될 수 있다. 먼저 사퇴한 윤 전 총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빼박’ 못 하고 완주를 해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윤 전 총장에 대한 일각의 실망은 최 전 원장에게 타산지석이 된다. 평일의 윤석열 캠프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는데, 이는 그가 사람을 가리고 수사하듯 은밀히 정치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도리도리 윤석열’에 주목하는 이들은 총장 사퇴 후 3개월 동안 그가 도대체 뭘 했느냐는 질문도 한다. 연설 연습은 물론이고 사람을 모아 국가를 이끌 계획을 세웠어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 전 총장을 위해 모인 포럼 관계자들은 고생하느라 입술이 부르틀 지경이라지만 보여준 아웃풋이 아직 없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경기도지사 캠프는 이해찬 전 대표와 조정식 의원의 지휘 아래 공약과 선거 전략을 차곡차곡 마련해가고 있다.
정치를 하려면 판세를 잃고 다른 세력과 거중 조정을 해줄 원로 정치 전략가가 필요하다. 전모 씨는 그러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윤 전 총장 측과 접촉을 시도한 그는 떨어져 나왔다고 한다. 윤 전 총장이 대광초와 서울대 법대 동문에 의지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내비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성 정치인을 피하다 보니 윤 전 총장은 교수와 법조인을 주로 캠프에 배치했다. 이들은 깨끗할 수는 있지만 사회의 당면 문제에 현실성 있는 즉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윤 전 총장의 연설이 ‘윤석열에 의한’ ‘윤석열의’ 잔치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판사는 검사보다 더 은둔적인 직업이다. 그런 점에서 윤 전 총장의 폐쇄성과 어수선함이 최 전 원장에게서도 재연될 수 있다. 최 전 원장 주변에도 익숙한 법조인들부터 모인다는 지적이 있다. 최 전 원장과 통하려면 그와 오랜 우정을 쌓아온 강모 변호사 등을 통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는 그의 한계가 될 수 있다. ‘사상 최고 명문’ 경기고 출신이라 명망가 동문이 즐비하고, 집안은 병역 명문가이며, 동서들은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속 연구원, 유엔(UN)에서 일한 교육자, 언론사 간부라는 점이 되레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전 총장보다 더 정치 전략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제2의 반기문, 황교안?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박해할 때 맞서 싸우지 못한 윤 전 총장처럼, 최 전 원장도 평생 공직에 몸담았기에 ‘새가슴’이라는 분석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하면서 던진 한마디 비난에 마음이 쓰여 그가 정치 포기를 검토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기도 했다. 정치를 하는 첫 번째 조건은 강력한 ‘권력 의지’인데, 평생 ‘맑은 곳’에서 살아온 공직자 출신은 그것이 약해서 문제다. 미담만 있는 공직자일수록 이전투구를 회피하니, 노련한 정치인은 어렵지 않게 그를 후퇴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윤 전 총장 대안으로 주목받은 최 전 원장이 대권 도전을 포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21대 총선 참패 직후 황교안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대표가 바로 사퇴한 것은 공직자(검사) 출신의 머들 스루(muddle through) 능력 부재를 보여준다. ‘정치 9단’ 이재명 지사 등 여당 후보들과 야당 홍준표 의원 등은 이를 꿰뚫고 있기에 ‘더 맑은’ 최 전 원장을 먼저 공격할 수 있다. 미담이 많은 사람일수록 뜻밖이나 말도 되지 않는 비난에 취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 의지가 약한 이는 비난이 늘면 명예 수호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최 전 원장이 무너지면 윤 전 총장을 공략하기도 쉬워진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운명공동체다. 출마 의지를 굳힐수록 ‘최재형 X파일’은 구체화된다.
한 달여 시간 동안 최 전 원장은 권력 의지를 가진 이로 변신할 수 있을까. 전략가를 만나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공약을 만들 수 있을까. 페이스메이커를 하든, 대체재가 되든 그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회군과 황 전 대표의 사퇴가 재연된다면 홍준표 의원이 아닌 새로운 보수를 기대하던 세력에겐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입당부터 시작해 그는 많은 것을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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