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됐던 남북의 통신선이 27일 10시부터 복구돼 서로간의 통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좀 뜻밖의 진척이라 할 수 있죠. 북한은 지금까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내세우며 철저한 ‘셀프봉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과의 통신선을 복구하며 외부에 손짓을 한 것은 그만큼 내부 상황이 어렵다는 의미일 겁니다.
김정은이 무슨 의도로 남북 통신선을 복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는지, 복원 이후 언제, 무엇을 요구할지 등은 아직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재 북한 내부 사정을 통해 가능성이 높은 북한의 다음 행보를 예상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한국의 지원을 받기로 결심한 것이냐는 예상에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특히 김정은이 고심 끝에 외부 지원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내린 시점은 최근 며칠 사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달 29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김정은은 비상방역과 관련한 중대사건이 발생했다며 간부들을 질타했습니다. 군부 1인자 이병철 노동당 군사위 부위원장과 2인자 박정천 총참모장은 원수에서 차수로 강등됐고, 3인자 김정관 국방상도 차수에서 대장으로 강등됐습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국경 개방에 대비한 비행장 소독 문제였다고 밝혔습니다. 평안북도 의주비행장을 소독 거점으로 정했는데,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경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고 7월 중순 이전에 의주비행장 방역시설이 완공됐다고 합니다. 국경을 여는 것이 시급한데, 방역시설이 준비되지 못해 수입을 할 수 없었다면 상식적으로 완공이 된 뒤 수입이 물밀 듯 이뤄져야 합니다. 하지만 보름 넘게 김정은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중국에서 아무런 물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정은은 인적 교류 역시 현재 승인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 등 해외에는 체류기간이 만료됐지만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외교관, 무역일꾼, 노동자, 유학생 등이 수천 명이나 있습니다. 이중 가장 고위급이라 할 수 있는, 2월에 임기가 만료된 지재룡 중국 주재 북한 대사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베이징에 머물만큼 북한의 인적 교류 차단은 철저합니다.
물론 대다수는 귀국 기간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해외에 머무는 것에 만족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에 돌아가 봐야 이어지는 노력동원과 조직생활로 땡볕에서 고생만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소식통에 따르면 귀국 기간이 썩 지난 사람들에게도 이미 올해 중엔 귀국이 불가능하다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돌아와야 할 북한 간부도 받지 않는데 한국이나 중국과 인적 교류를 하겠습니까. 통신선 복원과 상관없이 올해 말까지 북한과의 인적 왕래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만 물자 수용은 받으려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도 웬만큼 버틸 수만 있다면 받지 않을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북한 내부 상황이 몇 달 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여의치 않습니다.
이미 6월에 군량미 창고까지 탈탈 털었는데도 일부 지역에선 아사자가 나온다는 대북 소식통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김정은은 결국 중국과 한국에서 지원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을 겁니다.
김정은은 28일 평양 모란봉구역에 있는 북중 우의탑을 찾아가 헌화하고 북중 친선 계승을 다짐했습니다. 우의탑은 중국인민지원군의 6·25 참전과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북중 친선의 상징이긴 하지만, 북한 지도자가 직접 찾아가는 것은 이례적입니다. 그럼에도 직접 김정은이 행차를 한 것은 지금이 중국에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이 매우 크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일 남북 통신선을 연결하고, 28일 중국에 메시지를 던진 것은 중국과 한국에 동시에 문을 열어 지원을 받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당장 북한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식량입니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건설자재입니다. 지금 평양에 1만 세대 건설을 벌여놓고 수십만 명을 동원시켰는데 자재가 없으면 진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수십 만 명이 건설현장에 임시로 만들어놓은 텐트 속에서 에어컨과 선풍기도 없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자재도 보장할 능력조차 못되면서 자신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해 괴롭히는 당국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고층아파트 건설에 필요한 철강재와 시멘트는 내부에서 생산한 것들이 질이 나빠 쓸 수가 없어 중국에서 수입해 들여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미 북한은 3월부터 몰래 서해상에서 중국과 밀무역을 통해 정말 급한 철강재와 시멘트는 조금씩 들여갔습니다.
한국에 손을 내민다면 이런 물자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것 역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중국의 지원 물자를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미 중국이 북한에 식량 70만 톤 지원을 제안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철강재와 시멘트 역시 유엔의 대북제재 위반 사항에 걸리기 때문에 한국에 요구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 백신 역시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한국도 없어서 난리인데, 그런 와중에 북한에 주게 되면 한국 정부가 엄청난 비난 여론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김정은이 한국에 바라는 것이 식량일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한편으로 코로나 사태에 남북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던져온 한국 정부는 코로나 협력이라는 명분도 보여야 합니다. 이럴 경우 한국에서 여유가 충분한 마스크와 진단키트, 대북제재 위반항목에 걸리지 않는 의료장비들이 지원될 수 있습니다. 마스크와 진단키트, 의료장비 같은 것은 중국이 무상으로 주기엔 애매한 것들입니다.
물론 지원이 이뤄져도 사람과의 접촉은 철저히 차단될 것입니다. 북한의 항구 중에 현재 방역 시설이 제일 잘 완비된 곳이 남포항입니다. 육로보단 해상으로 남포항에 가서 북한 사람과의 접촉 없이 하역하는 방안이 우선적으로 거론되겠죠.
김정은에겐 어디까지나 중국의 지원을 먼저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한국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온갖 막말로 비난을 하다가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이 김정은으로서도 썩 내키는 상황은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한국을 향해서도 유화 신호를 보낸 것은 백업 지원자가 필요하기 때문이겠죠. 즉 중국이 주고 모자라는 것과 중국이 주지 못하는 것을 줄 수 있는 백업 선수로 한국을 선택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정부가 제발 문을 열고 나와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을 것이니 마지못해 나오는 척 명분도 챙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과거 북한은 수틀리면 “자기들이 먼저 만나자고 해놓고”라며 남북 간에 오간 비밀대화를 공개한 전례가 종종 있습니다. 이번에도 김정은의 기분을 나쁘게 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보냈다는 친서들을 공개해 현 정부를 곤욕에 빠뜨릴 수 있음을 늘 계산해야겠죠. 그러니 남북 간에는 친서를 보낼 때도 항상 나중에 북한에 약점을 잡힐 내용은 절대 넣으면 안 됩니다.
북한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요청하기 위해 통신선을 연결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사실 한미연합훈련은 김정은에게 큰 걱정거리는 아닙니다. 북한은 항상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라고 맹비난해오긴 했지만, 한미연합군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가 훈련을 할 때 북한이 대응훈련을 하지 않은 지도 이미 오래 됐습니다. 한국 상공에서 전투기들이 훈련할 때 북한 상공에 이에 대응하는 전투기들이 한 대도 뜨지 않은 적이 많습니다. 선제공격을 당할까봐 불안한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그럼에도 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것은 이것만큼 미국과 한국을 압박할 좋은 명분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기대 이상의 흡족한 지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한미연합훈련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북한이 급작스럽게 통신선 연결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수입 또는 지원 물자가 빠르면 8월 초부터 들어갈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지원물자를 받게 된다면 협의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변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다시금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금이 코로나 방역에 가장 힘을 기울여야 할 때이죠. 그런데 1년 반이 넘도록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 있던 북한이 하필 가장 안 좋은 타이밍에 문을 열려 하는 것은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식량난이죠. 아무리 방역이 중요해도 북한 내부에서 대량아사가 나오는 것이 김정은에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마 겨우 버틸 정도의 식량만 있다면 김정은은 올해 내내 문을 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7월말이면 올해 작황이 가늠이 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지난해엔 홍수 피해로, 올해는 가뭄 피해로 작황이 매우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올해 폭염에 따른 가뭄이 오지 않았다면 북한은 이제부터 수확될 옥수수와 감자 등으로 버티려 했겠죠. 결국 폭염을 보고 김정은은 “올해까지 버티기 어렵구나”를 직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이 폭염이 어쩌면 남북관계를 새로 시작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