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양자 대결 여론조사에서 상대방을 압도했다. 독자 지지 기반은 약했지만, 상대 진영이나 라이벌에 비해 확장성이 컸다. 지지율 하락 국면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정권의 각종 게이트와 한일월드컵 4강에 따른 ‘정몽준 바람’으로, 이 전 대통령은 BBK 의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로 지지층 분산을 겪었지만, 한 번 높은 곳에 올라본 경험은 증발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결국 대통령이 됐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지지율 하락도 충분히 예상된 일이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들쑥날쑥한 지지율은 지지층이 탄탄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문제는 윤 전 총장의 경우 앞선 두 대통령과 다른 이유로 지지율이 하락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이명박 대선후보는 구도가 변화하며 지지율이 흔들린 반면, 윤 전 총장은 이렇다 할 구도 변화가 없었다.
지지율↓ 기술 아닌 방향 문제
7월 25일 정치권에 몸담아온 인사들이 윤석열 캠프에 대거 보강되고 닷새 후 윤 전 총장이 국민의힘에 입당하면서 그간의 혼선이 수습되리라는 기대감이 생기고 있다.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에서도 하락세가 둔화되고 있다.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기자를 두고 “답변 마십시오, 좌파입니다”라고 말하는 지지자보다 새로운 합류자들이 대체로 나을 것이다. 그러나 캠프 보강 혹은 국민의힘 입당이 능사는 아니다. 지지율 하락 원인은 철저히 본인에게 있다. X파일 논란이 불거진 후 본인이나 가족의 전력보다 윤 전 총장의 최근 행보와 메시지가 더 큰 화근이었다. 이는 기술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윤 전 총장은 ‘주120시간 노동’과 ‘대구 민란’ 발언으로 설화를 겪었다. 7월 18일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언급했다. 이틀 후 대구에서는 “코로나19가 초기 확산된 곳이 대구가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면 ‘민란부터 일어났을 것이다’ 얘기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윤 전 총장은 즉시 시민들로부터 들은 말을 전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검사로 일하면서 근로기준법 위반을 무관용 원칙으로 엄단해 근로자를 보호하고자 힘썼다”고 해명했다. 처음부터 “기업에 대한 규제는 다소 완화해야 한다. 다만 노동자 기본권을 침해하는 불법은 엄벌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진보·보수를 망라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윤 전 총장은 “대구에 기득권을 수호하는 보수는 없다”는 발언도 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대구의 역사를 고평가하며 ‘수구’와 선을 그었는데도 ‘민란’과 ‘박근혜 재평가’ 발언만 주목받았다.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여러 발언 중 유독 특정 발언만 부각되는 연유는 무엇인지 말이다. 윤 전 총장의 메시지가 꼬인 원인은 그가 놓인 ‘구도’에 있다.
윤 전 총장은 국민의힘 입당을 미루면서도 보수 표심에 주로 호소했다. ‘전통 지지층의 지지만으로 대선을 이길 수 없고, 또한 전통 지지층의 지지 없이는 본선에 진출할 수 없다’는 대선 법칙이 있다. 정권교체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도 거대 양당 간 대결은 50 대 50으로 수렴되곤 했다. 국민의힘에 한동안 입당하지 않는 것은 50 대 50을 깨겠다는 기획이었다. 그러면서도 야권 내 경쟁을 통과하려 전통적 보수 지지층의 선호부터 넓히고 굳히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몸은 중간에 두고 시선과 말은 오른쪽으로 보냈다.
결과적으로 세상이 윤 전 총장에게 ‘가지려는’ 고정관념만 강화됐다. 대선 출마 선언이 어떻게 수용됐는지부터 살펴야 했다. “‘반문’(반문재인)과 ‘정권교체’만 강조됐다” “보수색이 강하다”는 평가가 많았고 독자색이 돋보이는 대목은 묻혔다. “승자독식은 절대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라는 구절이 그렇다. 이는 ‘여당의 검찰 장악’ 이상으로 ‘분배 문제에 취약한 국민의힘’을 겨누고 있다. 윤 전 총장은 출마 선언 직후 기자들에게 “성장을 해야 복지도 할 것 아니냐는 생각에 대해 조금 거리를 두고 있다”고도 말했다. 국민의힘과 차별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장면이다. ‘성장을 해야 복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성 보수의 관습적 문법이다.
거대 양당, 尹 보수 이미지 구축 한뜻
그동안 이 같은 면모는 더불어민주당(민주당)과 국민의힘의 협공으로 묻혔다. 민주당은 윤 전 총장이 중도나 진보에 접근하지 못하기를 바란다. ‘보수’로 낙인찍거나 ‘극우’로 몰아야 영토를 확장하기 편하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없는 정권교체’를 기대하기 난망했다. 특히 국민의힘 입당 전까지 같은 편인 것처럼 묶어둬야 했다. 윤 전 총장이 국민의힘과 차별화되는 이야기를 해도 듣지 못하거나 못 들은 척한 이유다.
양대 진영의 전략은 ‘윤석열을 오른쪽에 묶어두는 것’으로 묘하게 일치했다. 윤 전 총장 본인도 보수 지지자에 호소하는 행보에 기대며 여기에 합세한다. 이렇게 된 이상 다수 대중도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윤 전 총장이 아무리 ‘도리도리’를 한들 오른쪽으로 볼 때만 플래시가 터진다.
윤 전 총장의 숙제는 지금의 구도를 깨는 것이다. 2017년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의 사례가 반면교사다. 안 후보는 진보·중도·보수의 고른 지지에 힘입어 문재인 후보를 바짝 추격했지만 TV토론 부진 등으로 진보·중도층이 떨어져나가자 보수층은 ‘반문(반문재인)’ 대표선수를 홍준표로 교체했다. 이런 전철을 피하려면 민주당의 재확장을 저지하면서 국민의힘 지지층에게 ‘유일한 승리 카드’로 인정받아야 한다. 대진표가 정리된 다음에도 중도확장을 꾀할 기회가 있겠지만, 당장의 지지 이탈이 심화되면 본선에서 회수하기 어렵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윤 전 총장이 국민의힘에 입당한 현재도 달라지는 이치는 없다. 거꾸로 더 확실한 중도확장행보에 나서야 한다. 어차피 전통보수층은 당원, 의원들이 서는 보증을 받아가며 안심시킬 수 있고, 그들이 조금 이탈한들 야권의 판도를 바꾸기는 어려우며, 전통보수층은 결국 최종후보에게 결집하는 법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