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데이(D-Day)는 24일. 비상연락망으로 급박하게 집결 시간과 장소가 통보됐다. 작전 대상자는 모두 365명. 앞서 자력으로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 진입에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리 정부의 현지 재건 활동에 협력했던 아프간 현지인과 그 가족들. 절반가량은 10세 이하 어린 아이들로 이번 달 태어난 갓난아기도 있었다.
우리 정부 입장에선 ‘조력자’지만 탈레반은 이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주요 거리마다 촘촘하게 세워진 ‘탈레반 검문소’를 통과하는 건 이들에게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정부 당국자는 “검문소가 그들에겐 ‘지옥문’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주아프간 한국대사관에서 일했던 한 아프간 남성은 “탈레반은 누가 한국 정부와 일했는지 확인하려고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 “탈레반 검문소는 지옥문”
그렇다고 작전을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현지에 있는 미군이 이달 말 철군하기로 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것. 정부 관계자는 “현지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 27일을 사실상 (구출) 마지노선으로 봤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이달 초 아프간 조력자 구출 계획을 세운 뒤 외교부를 중심으로 국방부, 법무부 등이 공조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66명의 특수임무단을 태운 우리 군 수송기 3대가 투입된 건 23일 새벽. 한국행을 희망한 391명에겐 20일 공항 집결 디데이(24일)를 알리고 공항 게이트 안까지 오라고 통보했다. 다행히 언제든 상황이 생길 것에 대비해 매일 이들과 교신한 덕분에 내용 통보 자체엔 문제가 없었다.
관건은 탈레반 위협을 뚫고 이들이 무사히 공항에 올 수 있을 지였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틀이 지나도 공항에 도착한 사람은 26명에 불과했다. 자력으로 공항 주변에 밀집한 탈레반 검문소를 뚫고, 수천 명의 인파가 운집한 공항 안까지 진입하는 게 그만큼 힘들웠다.
고민하던 우리 정부의 시야에 ‘버스’가 포착됐다. 미국이 22일 탈레반과 협의해 버스로는 외국 정부 조력자를 카불 공항까지 이송을 허용했단 소식을 들은 것. 바로 여러 채널로 미국을 설득해 운용 가능한 버스 6대를 확보했다. 버스 확보 즉시 아직 공항에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시 버스 집결지와 시간을 통보했다.
그렇게 한국행 희망자 전원이 시간에 맞춰 버스 6대에 나눠 탑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공항 도착 직전 몇몇 탈레반 검문소에서 “통과 못 한다”고 위협한 것. 우리 공관원이 핸드폰에 저장된 여행증명서를 보여주자 “원본이 아니다”며 우긴 탈레반도 있었다. 정부 관계자는 “한국에선 이렇게 다 한다면서 실랑이 끝에 겨우 다시 이동할 수 있었다”고 했다.
● 작전명 미라클… 378명 한국땅 밟아
26일 마침내 아프간 조력자와 그 가족 378명이 한국땅을 밟았다. 정부가 아프간에서 이들의 탈출 계획을 세운 지 한달 여 만이다. 기착지인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이날 오지 못한 13명(3가구)은 개인 사정 등을 이유로 탑승하지 못했다. 정부 당국자는 “작은 수송기로 나머지 분들도 신속하게 모셔올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에 온 아프간인들은 오후 6시 6분경 인천국제공항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얼굴에 미소를 품은 사람이 많았다.
한 아이는 곰인형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론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버스로 이동했다.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걷는 어머니도 있었다. 아이들 손에는 각종 곰 인형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한 젊은 형제는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해맑게 웃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날 입국한 이들은 긴 여정과 시차 등으로 다소 피로를 호소한 사람은 있었지만 대체로 건강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이날 TBS 라디오에서 이번 작전을 두고 “아주 위험했지만 천운이었다”고 했다. 이번 현지인 수송 작전명을 ‘미라클(기적)’로 정한 이유에 대해선 “앞이 안 보이는 상황에 처해있던 아프간 현지인들에게 희망이란 뜻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8월 초부터 보안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문재인 대통령도 아프간인 안전이 확보됐단 소식을 듣고서야 안도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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