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중법 논란 6일 만에 입 연 文 “법 남용 우려 없어야”

  • 뉴시스
  • 입력 2021년 8월 31일 16시 02분


문재인 대통령이 31일 언론중재법 개정안 추진 논란 6일만에 관련 입장을 처음 표명한 것은 그동안의 고민이 적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본회의 강행 처리를 유보키로 했다는 여야 합의 발표 직후 즉각 환영의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그동안의 ‘침묵 공세’의 부담을 조금 덜게 됐다는 평가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회에서 여야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를 위해 숙성의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전했다.

문 대통령은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 기둥이고 국민의 알권리와 함께 특별히 보호받아야 한다”면서 “따라서 관련 법률이나 제도는 남용의 우려가 없도록 면밀히 검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악의적인 허위 보도나 가짜뉴스에 의한 피해자의 보호도 매우 중요하다. 신속하게 잘못된 보도를 바로 잡고 정신적·물질적·사회적 피해로부터 완전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며 “언론의 각별한 자정 노력도 필요하다”고 했다.

여야, 합의 직후 환영 입장 표명…양비론적 태도 비판 여전



문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민주당이 언론중재법 개정안 추진 과정에서 명분으로 내세웠던 피해자 구제 필요성에 힘을 실어주면서, 언론자유를 탄압하는 ‘언론재갈법’이라고 규정한 야권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 양비론적 태도로 풀이된다.

앞서 여야는 이날 오후 본회의를 열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제외한 나머지 쟁점 안건을 처리키로 합의했다. 안건에서 제외된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경우 다음달 27일 본회의에 상정하되, 협의체를 구성해 피해구제 등 세부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총 8인으로 구성키로 한 민정협의체는 여야 의원 2명이 언론계, 관계 전문가 각 2명씩 총 8명을 추천하는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앞서 언론단체가 제안했던 사회적 합의기구 설치의 틀을 수용한 것이다.

다만 여야가 협의체 구성을 통한 개정안의 숙려 기간을 갖기로 것 외에 주요 쟁점에 대한 입장차는 여전하다는 점에서 약속 기한인 다음달 26일까지 완전한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최대 5배 징벌적 손해배상 ▲고의·중과실 추정 ▲기사 열람차단 청구권 조항을 둘러싼 합의는 과제로 남아있다.

문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언론의 자유와 피해자 보호 모두가 중요하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회적 소통과 열린 협의를 통해 국민적 공감대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는 원론적 입장만을 밝힌 상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언론중재법의 구체적인 조항들과 내용에 관해서는 국회에서 협의하면서 합의안을 만들어 갈 일”이라며 “고의·중과실 추정 관련 수정안이 제시되기도 했었고, 또 야당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자체를 빼자는 제안들이 계속 국회에서 이루어졌었는데, 27일까지 숙성의 시간에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고만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발간한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문재인이 답한다’ 속에서 밝힌 대(對) 언론관을 기초로 놓고보면 그동안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 처리에 침묵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던 대통령의 입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대담집에서 토머스 제퍼슨 미국 제3대 대통령의 유명 발언을 인용하며 “언론이 없는 좋은 사회보다 나쁜 언론이 있는 사회가 낫다는 말처럼,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정당한 보도와 평가에 대한 가치는 존중해야 한다. 그런 태도는 예전부터 갖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밝힌 바 있다.

언론 자유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해 온 자신의 철학과 정면 배치되는 법안이 민주당 주도로 추진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데 궁극적인 고민이 닿아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실제 이날 언론 자유가 법·제도로 인해 남용 우려가 없도록 면밀히 검토돼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 위에서 해석된다.

그동안 청와대는 삼권분립 위반 소지가 있다는 표면적 명분을 내세우며 관련 입장 표명에 철저하게 거리를 둬왔다. 하지만 청와대가 생각하는 것 만큼 상황이 단선적이지 않았고, 그동안 갈등만 키우게 됐다는 결과론적 비판이 불가피해 보인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 편성 국면에서 국회가 파행을 거듭할 경우 국정운영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대통령과 청와대로 돌아오게 된다는 점에서다. 관망하고 있던 문 대통령이 마지 못해 나선 것도 당장 다음달 3일 국회로 제출될 내년도 정부 예산안 편성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국회에서 논의할 사안”이라며 여당 발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에 철저하게 선을 그어오던 청와대가 물밑으로 중재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철희 정무수석은 여야 협상에 난항을 겪던 지난 30일 국회를 찾아 윤호중 원내대표에게 법안 처리에 관한 청와대의 입장을 전달했다.

이후 민주당은 최대 5배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뼈대는 유지한 채 고의·중과실 추정 조항과 기사열람청구권을 원안에서 삭제하는 절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서 거부하며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뉴시스와 통화에서 “법안 자체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보다는 국정운영의 입장에서 언론중재법 갈등으로 인한 정기국회 파행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 것”이라며 특히 “백신과 방역이 포함된 내년도 정부 예산안 처리 국면에서 국회 대치 상황에 대한 우려 차원이었다”고 말했다.

與, 입법 폭주 과정 지켜본 靑…절차적 정당성 훼손에 ‘중재’



청와대 내부적으로는 지난 25일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법사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부터 적잖은 우려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야당 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여당 단독 처리로 법사위 문턱을 넘은 것이 절차적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과거 추미애 법무부 장관 시절 추진된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처리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 윤 총장이 추후 징계위 결과에 불복할 명분을 줘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라는 게 문 대통령 주문의 취지였다.

법조인 시절 다져진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대한 문 대통령의 원칙과 철학은 민주당이 추진 중인 언론중재법 강행 처리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게 청와대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청와대 관계자는 “평소 대통령이 원칙을 강조해 온 율사(律士)적 관점에서 여러 생각들을 해오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대(對) 언론관은 2011년 정치 입문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은 2012년 저서 ‘사람이 먼저다’에,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필요성은 2012년 대선 패배 직후 백서 성격으로 펴낸 ‘1219 끝이 시작이다’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돼 있다.

문 대통령은 ‘사람이 먼저다’에서 “권력은 언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권력은 언론을 통제하면 안 된다”고 썼다.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는 “언론이 눈을 부릅뜬다면 비상식이 기세등등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언론이 공정한 심판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만이 우리 정치가 정상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9대 대선 국면에서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회복 관점에서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공약했었다. 언론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하고,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을 정권차원의 탄압으로 규정했다.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에 공약의 방점이 찍혀 있다.

언론 자유·독립 공약했던 文…조국 사태 후 언론 책임 강조


2019년 10월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 이후 보여준 문 대통령의 대(對) 언론관이 비교적 명징하게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스스로의 자정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10월14일 수석·보좌관 회의 모두 발언에서 “언론 역할에 대해서는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며 “언론 스스로 성찰하면서 신뢰받는 언론을 위해 자기 개혁의 노력을 해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10월25일 청와대 녹지원에서 진행된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은 조국 사태 과정에서 보여준 일련의 언론의 보도행태에 관해 “과연 우리가 진실을 균형있게 알리고 있는지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나 노력이 필요하다”며 “(국가발전)에 앞으로도 많은 기여를 해줘야 할 막중한 역할과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강조했었다.

문 대통령의 가장 최근 언론관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7일 한국기자협회 창립 57주년 축사를 통해서다. 문 대통령은 “정부는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했다. 다만 청와대는 헌법상 원론적 가치를 언급한 것일 뿐 현재의 언론중재법과는 연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야권에서는 이러한 맥락에 근거해 여당의 언론중재법 입법 폭주의 최종책임이 문 대통령에게 있다며 거부권 행사를 압박해왔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전날 “(문 대통령이) 만약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모든 절차를 진행하려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국회가 의결해 보낸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 해당 법률안을 국회로 돌려 보내 재의(再議)를 요구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를 의미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 중 2차례, 이명박 전 대통령은 1차례 각각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가 있다. 문 대통령의 경우 임기 중 ‘타다 금지법’ 등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요구받아 왔지만 수용한 전례가 없다.

언론중재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여부에 관해서는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다. 거부권을 행사하든, 하지 않든 언론중재법이 본회의에 상정되는 것만으로도 당청 간 갈등이 불가피하다. 다급해진 청와대가 사전 중재에 나설 수밖에 없던 이유다.

여권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임기 말 당청 갈등이 전면에 부각될 수 밖에 없다”면서 “당초 대통령이 거부권까지 염두에 뒀다면 입법 과정에서 민주당과 조율을 거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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