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지난해에 이어 ‘선(先)종전선언, 후(後)비핵화’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임기가 8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인 만큼 정상들 간 ‘톱다운 방식’으로 북-미 비핵화 교착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2018년 4월 남북 판문점 선언 이후 거론하지 않던 종전선언의 주체를 ‘남북미중’으로 명시했다. 내년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종전선언을 추진해 국면을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하지만 북-미 간 비핵화 협상도 재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종전선언 카드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월 핵보유국을 전제로 한 핵무력 증강을 천명한 뒤 7월 초부터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는 등 핵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협상 복귀 전에 인센티브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은 문 대통령이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언급하지 않은 채 종전선언만 강조한 것을 두고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고 비판했다.
○ 文, 종전선언으로 마지막 승부수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나는 남북 간, 북-미 간 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한다. 상생과 협력의 한반도를 위해 남은 임기 동안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대선이 6개월도 남지 않았고 북한이 영변 핵시설까지 재가동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이번에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개의 필요성을 원론적으로 언급하는 데만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를 거론하며 종전선언 주체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남북한과 주변국들이 함께 협력할 때 그것은 훗날 협력으로 평화를 이룬 한반도 모델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임기 말까지 대북정책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주변국에 천명한 것.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22일 연합뉴스TV에 출연해 “종전선언은 한반도 비핵화로 가는 데서 신뢰를 구축하는 출발점”이라며 “비핵화를 이끄는 신뢰의 모멘텀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 北은 주한미군 철수 주장
관건은 미국, 중국 및 북한의 호응이다. 베이징 겨울올림픽의 주목도를 높이려는 중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미중 정상이나 고위 관계자들이 종전선언을 하는 것을 반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박 수석은 “중국 입장에선 한반도 평화, 동북아 평화가 올림픽 성공에도 기여할 모멘텀이라고 기대할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14, 15일 방한 기간 동안 정부와 이런 논의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왕 부장에게 “베이징 올림픽이 평창 올림픽에 이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또 한 번의 전기가 되기 바란다”고 했고 왕 부장은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하루에도 역사적인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중 갈등이 걸림돌이다. 특히 조 바이든 미 행정부 들어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아직 재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미국은 종전선언이 주한미군 철수의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종전선언 추진에 미온적이다.
더욱이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달 초 처음으로 한미 연합훈련 중단뿐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나선 상황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종전선언과 주한미군 철수는 별개의 문제”라며 “평화협정과 달리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전제조건 없는 종전선언을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비핵화의 상응 조치 차원에서 제시되는 종전선언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며 “미국은 종전선언을 위해서는 단계적 비핵화 로드맵이 먼저라는 입장이고 북한이 협상장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유인책을 제공할 의지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공허한 종전선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북핵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대선 주자인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는 “문재인 정권은 북한이 쏘는 미사일을 종전선언의 축포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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