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대남·대미 정책을 총괄하는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연일 담화를 내놓으며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했다. 표면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이끌려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대북 제재 완화와 핵보유국 인정 등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적인 움직임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여정이 연이틀 한국과 건설적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혀 하노이 노딜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 재개에 물꼬가 트일지 주목된다.
김여정은 지난 24일 “우리는 남조선이 때 없이 우리를 자극하고 이중 잣대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며 사사건건 걸고 들면서 트집을 잡던 과거를 멀리하고 앞으로의 언동에서 매사 숙고하며 적대적이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북남 사이에 다시 긴밀한 소통을 유지하며 관계 회복과 발전 전망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를 해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25일에는 “공정성과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유지될 때만이 비로소 북남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의의 있는 종전이 때를 잃지 않고 선언되는 것은 물론 북남공동연락사무소의 재설치, 북남수뇌상봉과 같은 관계 개선의 여러 문제들도 건설적인 논의를 거쳐 빠른 시일 내에 하나하나 의의 있게, 보기 좋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를 향해 독설을 하던 김여정이 이처럼 연이틀 남북 간 접촉 가능성을 언급하며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자 전문가들은 ‘급해 보인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로 인한 접경 봉쇄가 지속되는 가운데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인한 경제난이 심각해지자 북한으로서는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긴급하게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김여정의 잇단 담화는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한 데 이어 나왔다. 이 때문에 김여정이 문 대통령의 제안에 호응했다고 볼 수도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여정이) 급해 보인다. 종전선언 제안이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며 “하반기에 남북관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북한이 대화의 시기와 방식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면서 내년 베이징 올림픽, 한국의 대선 등을 앞두고 남북관계를 복원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면서 대화에 나오기 위한 정지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이 실리적인 판단에 따라 태도를 바꿨다는 해석도 나온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과 달리 현행 정전협정 체제를 깨지 않으면서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이벤트다. 이 때문에 북한은 종전선언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에 한미연합군사훈련 취소와 주한미군 철수, 그리고 이를 통한 한미동맹 이완을 주장할 수 있다. 김여정이 이날 “남조선 당국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실천”을 언급한 것은 한국 정부에 이 같은 조치를 실행하라는 주문으로 풀이된다.
이 밖에 최근 한국군이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에 성공한 것 역시 김여정의 잇단 담화의 배경 중 하나로 보인다.
그간 북한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할 때마다 한미 정부는 군사 도발이자 유엔 대북 제재 결의 위반이라며 비판해왔다. 이런 와중에 한국이 SLBM 발사에 성공하는 등 각종 신무기 개발을 과시하자 북한이 이를 반격의 기회로 포착한 셈이다.
특히 북한은 지난 15일 SLBM 발사장에서 나온 문 대통령의 “북한의 도발에 대한 확실한 억지력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을 거듭 문제 삼고 있다. 김여정은 15일 당일 담화에서 도발 언급을 비판한 데 이어 24일과 25일 담화에서는 ‘이중 기준’, ‘이중 잣대’라며 공세를 펴왔다.
북한은 향후 남북 대화 과정에서도 이 같은 피장파장의 논리를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군이 신무기 개발을 지속하고 있으니 북한의 신무기 개발도 비판하지 말라는 식의 주장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핵·미사일 개발이 도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승인받음으로써 기존의 핵 개발까지도 공인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되면 유엔 대북 제재 결의 등의 근거가 사라져 북한은 제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오만함이 도가 지나치다”며 “도발을 도발이라고 말 못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상 핵보유로 가는 길이란 것을 아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무진 교수는 “북한이 이중 잣대 철폐, 대북 적대시 정책 철폐만을 주장해 위기를 모면하고 자신들의 군사력 증강만을 합리화하기 위해 위장평화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이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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