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전 대통령은 최근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 골수종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전 8시 40분경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전 전 대통령은 굴곡 많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정점(頂點)에 선 ‘문제적 인물’이다. ‘하나회’를 기반으로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대통령 재임 내내 철권통치를 했고, 시민들은 결국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에 맞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퇴임 후에도 거액의 비자금과 ‘전 재산 29만 원’으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총애 받으며 ‘하나회’ 조직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에서 빈농(貧農)의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전 전 대통령은 유년기에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52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학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육사 시절 동기생인 노태우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오성회’를 조직했다. 육사 11기 동기모임인 ‘북극성회’에도 적극 참여했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는 전 전 대통령에 기회가 됐다. 그는 육사 생도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을 주도해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에 발됐다. 전 전 대통령이 1963년 노 전 대통령 등 육사 11주도로 결성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는 훗날 집권의 기반이 됐다.
1968년에는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서 김신조 등 무장간첩의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처하면서 박 전 대통령과 더욱 가까워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제1공수여단장,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보안사령관 등 잇따라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쿠데타로 군권 장악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 출범한 ‘최규하 과도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두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던 전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재가 없이 정 사령관을 연행하고 국방부와 육본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를 통해 군권(軍權)을 장악한 전 전 대통령은 이듬해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치며 빠르게 집권을 향해 나아갔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폭발적으로 분출됐지만 전두환의 신군부는 그 해 5월 18일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면서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거나 연금하고 국회도 폐쇄했다. 광주의 민주화운동은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어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에 의한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81년 1월에는 민주정의당을 창당한 뒤 총재 자리에 올랐고,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돼 7년 동안 재임했다.
전 전 대통령은 집권 후부터 본격적인 철권 통치를 시작했다.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의 하나로 설치한 삼청교육대에 일반인들까지 구금하며 악명을 떨쳤다. 동아방송 등 언론기관들은 “야당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이유로 강제로 통폐합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3년 23일 간의 단식투쟁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이한열 군 사망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증폭됐다. 결국 전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 “전 재산은 29만 원”…‘전두환법’까지 제정
1988년 퇴임 뒤 국회에서는 이른바 ‘5공 청문회’가 진행됐고 전 전 대통령은 재산 헌납을 발표한 뒤 백담사에서 은거했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 바로세우기’를 추진하며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그는 이른바 연희동 ‘골목성명’을 통해 “내가 헌정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내란세력과 야합해온 김 대통령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발했지만 검찰은 1996년 1월 전 전 대통령 등을 내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했다. 아울러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7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2003년 2월 당시 1872억 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을 공개해달라고 법원에 요구했다. 그가 제출한 재산목록에는 ‘현금은 없고 예금과 채권을 합쳐 29만10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2013년 여야는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 시효를 2020년까지로 연장하는 ‘공무원 범죄 몰수 특례법’ 개정안(전두환 추징법)을 통과시켰고, 검찰은 대대적인 수색과 압류에 나섰다. 결국 2013년 9월 전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미납 추징금 1672억 원을 모두 내겠다고 장남 재국 씨를 통해 밝혔다. 추징금 환수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연표
△1931년 3월 6일 경남 합천 출생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1955년 2월 육사 졸업(11기), 육군 소위 임관
△1969년 12월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대령)
△1973년 1월 제1공수특전여단장(준장)
△1978년 1월 제1보병사단장(소장)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
△1979년 12월 12·12 군사쿠데타로 군 장악
△1980년 3월 중앙정보부장(중장)
△1980년 5월 광주 5·18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1980년 8월 전역(육군 대장),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1980년 9월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 취임
△1981년 3월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 취임
△1982년 한국프로야구 창설
△1983년 아웅산 테러로 수행원 17명 사망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발생
△1987년 7월 이한열 열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1987년 6월 6월항쟁 및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수용
△1988년 2월 대통령 퇴임
△1989년 12월 국회 5공 비리 청문회 참석.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으로 진술
△1995년 12월 반란수괴, 내란모의참여,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 등으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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