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과락 걱정 ‘소년공’ 李, 수학 난제 척척 ‘모범생’ 尹

  • 주간동아
  • 입력 2021년 12월 11일 10시 32분


[이재명-윤석열 미셀러니] 학업·교우·리더십·연애… 돋보기로 성장 시절 들여다보니

[동아DB]
[동아DB]

1976년 봄 두 소년의 삶이 엇갈렸다. 한 명은 ‘신흥 명문’으로 떠오르던 고교에 입학했다. 장난기 많은 소년은 이곳에서 교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같은 시기 다른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목걸이 공장에 출퇴근했다. 초교 졸업장을 쥔 언 손이 채 녹기도 전이다. 두 소년의 이름은 윤석열과 이재명이다.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은 공통점이 별로 없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윤석열이 모범생으로 초중고교를 다닐 때, 이재명은 소년공으로 일한다. 반대로 이재명이 대학에서 교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을 때, 윤석열은 도피 생활은 물론 사법시험에도 8번 떨어진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거대 양당 대선후보로 뛰는 지금은 어쩌면 ‘지극히 예외적인 시기’다.

두 사람의 운명은 석 달 후 다시금 엇갈린다. 한 명은 대통령이 돼 인생의 정점을 보내고, 다른 한 명은 낙선의 쓴맛을 삼킨다. 각종 의혹 수사가 진척되면서 난처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은 1960년대 시작됐다.

‘인싸’ 윤석열, ‘아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왼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어린 시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왼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어린 시절.


“윤석열 집은 아담한 한옥이었는데, 먼지 한 톨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재래식 화장실이 수세식 화장실보다 깨끗하더라. 책상 역시 잘 정돈됐는데, 전기스탠드에 ‘이마’라고 쓰여 있었다. 무슨 뜻이냐 물었더니, 아버지 이야기를 하더라. ‘인상을 찡그리지 말고 활짝 웃는 얼굴로 살아라. 이마에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하라’는 가훈을 내렸단다. 어린 윤석열은 이를 잊지 않으려고 스탠드에 이마라고 써놓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윤 후보의 죽마고우로 지낸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이 교수는 윤석열을 “굉장히 외향적이고 친구를 두루 사귀는 스타일”로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윤석열은 구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윤석열의 아버지는 경제학자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다. 그는 훗날 윤석열이 사법시험에 8번 떨어졌을 때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을 만큼 아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윤석열은 1967년 서울 성북구 대광국민학교(현 대광초)에 입학했다. 당시 대광초는 한 학년에 160여 명이 다니는 작은 학교였다. 윤석열은 밝은 성격으로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요즘으로 치면 ‘인싸’였다. 초교 동창들은 윤석열을 웃음기 가득한 소년으로 기억한다. 집안부터 교우관계까지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게 없는 환경이었다.

이재명의 초등학생 시절은 정반대다. 그는 당시를 “‘인싸’에 낄 수 없는 ‘아싸’, 주류가 아닌 비주류. 내 비주류 역사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고 회상한다.

1970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삼계국민학교(현 월곡초 삼계분교)에 입학한 이재명은 매일 5㎞ 산길을 걸어 등교했다. 학교에 도착해도 고행은 이어졌다. 가정 형편상 준비물을 챙기지 못해 혼나기 일쑤였다. 미화작업을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뺨을 27대 맞은 적도 있다. 학교는 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1학년 때만 결석이 80일을 넘겼다. 자연히 성적도 미미미미미….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적이 좋아졌다. 4학년 때 제법 좋은 시험 점수를 받았지만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리라고 내다봐서다. 1976년 ‘꽃다발도, 짜장면도 없는 국민학교 졸업식’을 마친 그는 고향을 떠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경기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성남시와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윤석열과 이재명 두 사람의 삶은 이 시기 극단으로 갈린다.

“비천했다”던 李 소년공 시절
이재명의 삶은 대선 국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회자된다. 이재명은 12월 4일 전북 군산시 공설시장에서 “비천한 집안이라서 주변을 뒤지면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며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내 출신의 비천함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나를 탓하지 말아달라. 나는 그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연설했다. 형수 욕설 등 과거 수많은 논란은 거친 성장 환경에서 비롯한 얼룩이라는 얘기다.

야권은 이를 두고 ‘견강부회’라고 지적한다.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이양수 수석대변인은 “가족사를 누구도 비난한 적 없는데 스스로 ‘출신이 비천하다’며 자신의 일생에서 벌어진 일 모두가 ‘비천한 출신 탓’이라고 돌려세웠다. ‘그분’의 ‘대장동 게이트 의혹’ ‘살인자 전문 변호 논란’ ‘변호사비 대납 의혹’ ‘형수 욕설 논란’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천한 출신 탓’이라는 것”이라면서 “주변이 아니라 이재명 후보의 인식 자체가 천박하고 비루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평가와 별개로 삼계초 졸업 후 ‘소년공 시절’은 이재명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때로 묘사된다. 이재명은 성남시 상대원동 단칸방에 세 들어 살며 공장에서 일했다. 고무를 다룬 ‘동마고무’, 야구 글러브를 만든 ‘대양실업’, 시계를 만든 ‘오리엔트’ 등이 일터였다. 대양실업은 1977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프레스에 손목 관절이 눌리면서 골절된 것이다. 팔의 성장판이 다친 탓에 이듬해부터 왼팔이 굽었다.

공장 일에 지친 이재명은 ‘고졸 자격’을 얻으면 관리자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1978년과 1980년 차례로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본 이유다. 소년공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했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고입 검정고시에서 국어 75점, 사회 72.5점, 수학 64점, 과학 82.5점, 체육 85점, 영어 45점, 농업 67.5점, 음악 70점, 미술 70점을 받았다. 평균점수가 70.17로 합격 커트라인(60점)을 넉넉히 넘겼지만, 영어에서 자칫 과락할 뻔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40점에 미달하는 과목이 있으면 불합격 처리됐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검정고시를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다행히 당시 성일학원 원장의 도움으로 공부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김창구 전 성일학원 원장은 “돈이 없다”며 학원을 그만두겠다는 이재명에게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해야 한다. 재명이 넌 공부해야 될 놈이야”라고 말하며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이재명이 힘겹게 고교 과정을 마친 그 시기 윤석열은 수학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재명 대선후보의 1978년 고입 검정고시 응시 원서 사진(왼쪽). 윤석열 대선후보의 1976년 고교 선발고사 수험표. [사진 제공 · 이재명 선거캠프, 사진 제공 · 윤석열 선거캠프]
이재명 대선후보의 1978년 고입 검정고시 응시 원서 사진(왼쪽). 윤석열 대선후보의 1976년 고교 선발고사 수험표. [사진 제공 · 이재명 선거캠프, 사진 제공 · 윤석열 선거캠프]


“고등학생 시절 윤석열은 한 마디로 ‘모범생’이었죠. 반장을 하거나 반에서 ‘나대는 친구’가 아니었어요. 그냥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신용락 전 수원지방법원 판사의 말이다. 신 전 판사는 윤석열의 충암고(8기), 서울대 법대 동기다. 충암고 2학년 때부터 2년간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충암고는 바둑, 야구 등에서 두각을 보인 학교다. 특히 윤석열 입학 2년 전부터 ‘신흥 명문’으로 부상했다. 충암고 동기회장 출신 A씨는 “6기 졸업생을 기점으로 10여 년 동안이 충암고 전성기다. 매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입학자를 100여 명씩 배출해 신흥 명문으로 불렸다”고 설명했다. 고교 3학년 때 윤석열의 동급생이던 김모 씨는 “같은 반에 공부보다 노래 등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한 친구들도 있었다. 윤석열은 이들과 접점이 크지 않았고 공부에만 집중했다”고 회상했다.

윤석열이 가장 관심을 보인 과목은 수학. 당시는 입시생이 대학별 ‘본고사’를 치르던 시절이다. 유독 악명 높은 난도의 수학 문제가 있었다. 동기들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윤석열에게 들고 갔는데, 그는 곧잘 풀었다고 한다. 신 전 판사의 말이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가 있으면 일부러 윤석열한테 보여줬죠. 수업을 듣지 않으면서까지 하루 종일 문제를 들여다보더라고요. 증명 문제 등 까다로운 문제를 많이 보여줬는데 결국 종례시간 전까지 다 풀었어요. 해답지에 없는 독창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윤석열은 당초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경제학 등을 공부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구체성 있는 학문’을 권하면서 마음을 돌려 법대 진학을 결정한다. 윤석열과 이재명은 1979년, 1982년 각각 서울대 법대, 중앙대 법대에 입학한다. 이 둘의 처지는 이때부터 교차한다. ‘소년공 이재명’은 교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인생 처음으로 모범생 생활을 한다. 남들보다 빨리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부모, 검정고시 학원 교사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모범생 윤석열’은 군사정권의 눈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는가 하면 사법시험에도 연거푸 떨어진다.

도피 생활·사법시험 9수…
시작은 대학 2학년 때 참여한 모의재판이다. 윤석열은 1980년 5월 서울대 학생회관 2층에서 12·12에 관한 모의재판을 한다. 재판장을 맡은 그는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와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이 소식은 외부로 퍼졌고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는 먼 친척은 “피신하라”고 경고한다. 그는 외가 친척집으로 석 달간 피신한다.

결국 학교로 돌아왔고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성격은 그대로였다. 윤석열을 상징하는 네 글자는 두주불사(斗酒不辭)다. 신 전 판사는 “술을 마시면서 윤석열 인맥이 무지하게 넓어졌다. 고등학생 때와는 다른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윤석열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살았기에 신촌과 광화문 일대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당시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면 친구를 꼭 마주칠 정도였다고 한다.

신 전 판사는 “통금이 있는 시기였다. 신촌에서 놀다 통금 시간이 임박하면 윤 후보 집에 가서 잠을 자는 식으로 놀았다”고 회상했다. 윤석열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들을 자주 집에 불러 함께 밥을 먹으며 우정을 다졌다. ‘식사 초대’ 사교술은 검찰 생활을 하면서도, 국민의힘에 입당한 후에도 이어진다.

술은 그에게 수많은 친구를 만들어줬지만 그만큼 공부할 시간을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사법시험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원인으로 친구와 술이 거론된다. 1차 합격은 79학번 중에서 빨랐고 성적도 좋았다. 대학 동기인 이철우 교수는 “윤석열은 재학 중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이른바 ‘사법시험 1진’에 낄 뻔했다. 1차 시험 성적도 합격자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았다. 시험공부에만 전력투구해 순차적으로 2차 합격을 한 동기들과 달리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연거푸 불합격했다”고 말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친구, 후배들과 술자리가 삶에 피해만 끼친 것은 아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니 그가 뿌린 씨앗은 그대로 되돌아왔다. 신 전 판사의 말이다.

“수원지법에서 일할 때 윤석열이 뒤늦게 검사가 돼 배치됐어요. 옛날 생각이 나서 ‘애들 데리고 와라, 밥 사줄게’라고 말했죠. 검사시보 생활을 하는 후배들에게 밥이나 사려는 생각이었어요. 점심시간이 되자 수원지검에서 일하는 현직 검사들이 ‘석열이 형’ 하면서 졸졸 나오더라고요. ‘너는 부장검사부터 시작하는구나’라고 농담으로 말했죠.”

윤석열의 ‘동기 사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대선후보 신분인 지금도 서울대 법대 동기들의 경조사에 화환을 보내며 챙긴다. 초중고교 및 대학 동기 다수가 지금도 윤석열을 마음으로나마 응원하거나 돕고 있다.

이재명 대선후보의 대학생 시절(왼쪽). 윤석열 대선후보(왼쪽에서
두 번째)의 대학생 시절. [사진 제공 · 이재명 선거캠프, 사진 제공 · 윤석열 선거캠프]
이재명 대선후보의 대학생 시절(왼쪽). 윤석열 대선후보(왼쪽에서 두 번째)의 대학생 시절. [사진 제공 · 이재명 선거캠프, 사진 제공 · 윤석열 선거캠프]


“이재명한테 부탁해라”
윤석열이 한창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1982년 이재명은 중앙대 법대에 입학한다. 소년공 경험은 중앙대를 선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생활비를 보조하는 중앙대 장학제도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이재명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과외 등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 이재명은 단과대 학장은 물론, 중앙대 인근 음식점 사장들의 기대를 두루 받았다. 중앙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를 두고 교수 사이에서는 “이재명은 사법시험에 꼭 합격할 것”이라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 이재명은 4년 후 사법시험(28회)에 합격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82학번인 더불어민주당 문진석 의원은 “대학 주변 음식점에서 사장님 소개로 이 후보를 처음 대면했다. 당시 사장님이 ‘사법시험 1차 합격한 친구’라며 소개해줘 합석했다”고 말했다. 3학년 때 처음으로 1차 시험에 합격한 이재명은 2년 후 2차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교수와 상인은 물론, 후배들도 이재명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재명을 두고서는 “후배를 잘 챙겼다”는 평가가 많다. 후배들 역시 그를 잘 따랐다. 대학생 시절 ‘보스 기질’ ‘해결사적 면모’를 보였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이재명 입학 이듬해에 교편을 잡은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1980년대는 한창 학생들이 목소리를 낼 때잖아요. 한 번씩 학생들이 지나친 요구를 할 때도 있지 않겠어요. 학교에서도 골머리를 앓았는데 당시 단과대 학장이 학과장에게 ‘이재명한테 부탁해 좀 가라앉히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만큼 후배들이 이 후보를 잘 따랐어요. 통솔력과 보스 기질을 갖춘 학생이었죠.”

이재명은 후배들의 호응에도 보답했다. 이 명예교수는 “학생운동을 하느라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한 후배들을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하는 등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문 의원 역시 “이 후보가 운동권 전면에 나서서 활약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생 시절부터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어왔다”며 “사법시험에 일찍 합격해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돈을 벌었다. 후배들을 모아놓고 밥도 사주며 많이 챙겼다”고 말했다.

다만 이재명은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1980년대는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다. 이재명은 당시 사회운동 대신 공부를 선택했다. 이재명은 “우선 공부를 좀 한 뒤 만약 법조인이 되면 판검사가 아니라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회상했다. 하나 둘 감옥에 가는 친구들을 보며 이재명은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연애와는 인연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아내 김혜경 씨(왼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 [동아DB]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아내 김혜경 씨(왼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 [동아DB]


엇갈린 삶을 산 두 사람이 유독 공유하는 경험이 있다. 바로 연애다. 이재명과 윤석열은 모두 연애에 서툴렀다. 이재명은 오리엔트 공장에서 일할 당시 ‘검사실 그녀’,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는 ‘독서실 그녀’, 대학생이 돼서는 ‘삼계초 동창 그녀’를 향한 마음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감정을 표현하지도 못한 채 마음을 접었다. 그는 당시를 “쓸데없는 자존심만 강해서 조금이라도 거절당한다 싶으면 마음을 접어버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재명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후 지금의 배우자 김혜경 씨를 미팅을 통해 만났다.

윤석열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지만 정작 연애에는 “둔감했다” “인기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성들과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아내 혹은 친구의 여자친구와는 잘 지냈다. 본인의 연애 전선만 좋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없진 않았겠으나 잘 되지 않았다. 좀처럼 연애를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친구들이 안타까워했다. 대학 동기인 김영준 전 창원지검장이 들려준 일화다.

“단골 카페 1층에서 윤석열과 다른 친구 한 명, 이렇게 셋이서 놀고 있는데, 2층에 여성 3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줄곧 연애를 하지 않는 윤석열이 마음에 걸려 ‘저 사람들을 1층으로 데려오라’는 특명을 줬죠. 윤석열이 올라가더니 얼마 후 여성들이 내려와 합석했습니다. ‘숫기 없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놨습니다. 알고 봤더니 2층 청소를 해야 한다고 1층으로 내려가라고 했더라고요.”

친구들은 윤석열이 2012년 김건희 씨와 결혼 계획을 알리자 기뻐했다. 쉰 살이 넘도록 결혼하지 못하자 “몽달귀신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던 차였다. “나이 쉰에 결혼식 사회를 봐야 되는 것 아니냐”는 기분 좋은 볼멘소리도 나왔다. 결혼식 사회는 결국 윤석열의 후배 검사가 맡았다.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18호에 실렸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