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정치적 부담이 적지 않았음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신년 특별사면 대상자에 포함시키면서 표면적으로 제시한 명분은 건강상태와 국민통합이다.
중대범죄자의 경우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하겠다는 대선 공약에서 물러서는 정치적 부담을 감수한 것은 퇴임을 5개월 여 남겨둔 상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껏 추진해 온 적폐청산보다 국민통합을 마지막 정치적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는 바람이 투영된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딛고 탄생한 촛불정권이라는 정치적 한계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기말 통합과 화합의 제스처를 취한 게 아니냐는 해석에 보다 무게가 실린다.
청와대는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만 차기 대선을 3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전격적으로 단행된 문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는 향후 정치권에 적잖은 후폭풍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법무부는 이날 오전 9시30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오는 31일자로 이들을 포함한 3094명에 대한 2022년 신년 특별사면·복권 등을 단행한다고 밝혔다.
특별사면·복권 대상에는 ▲일반 형사범 2650명 ▲중소기업·소상공인 38명 ▲특별배려 수형자 21명 ▲선거사범 315명 ▲사회적 갈등 사건 관련자 65명 ▲노동계 및 시민운동가 2명 ▲낙태사범 1명 등 총 3092명이 포함됐다.
취임 후 처음 단행된 2018년 신년 특별사면(6444명)과 2019년 3·1절 100주년 특별사면(4378명), 2020년 신년 특별사면(5174명)과 비교하면 다소 줄어들었다. 2021년 신년 특별사면 대상자(3024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문 대통령은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밝힌 특별사면·복권 단행 배경으로 박 전 대통령의 악화된 건강 상태와 국민통합이라는 크게 2가지를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앞에 닥친 숱한 난제들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국민통합과 겸허한 포용이 절실하다”며 “박 전 대통령의 경우 5년 가까이 복역한 탓에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진 점도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면이 생각의 차이나 찬반을 넘어 통합과 화합, 새 시대 개막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사면에 반대하는 분들의 넓은 이해와 해량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특별사면을 심의·의결하는 임시국무회의에서 코로나19로부터의 민생안정과 국민 대화합을 이루는 데 그 취지가 있다던 김부겸 국무총리의 설명과 맥을 같이한다.
고령자·중증환자 등 어려운 여건의 수형자에 대한 인도적 배려 차원도 함께 담겼다는 김 총리의 발언이나 박 전 대통령의 나빠진 건강 상태를 고려했다는 문 대통령의 설명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의미다.
이번 특별사면·복권 대상에는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한 전 총리,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복역 중이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도 포함됐다. 그러면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제외됐다. 국민통합을 사면 명분으로 내세운 점에 비춰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 두 분이 어떻게 (사면 기준이) 다른지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다”면서 “짐작하는 대로 판단해 주면 좋겠다”고만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뇌물·알선수재·알선수뢰·배임·횡령을 5대 중대 부패범죄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하겠다는 공약에 따라 정치인 사면을 자제했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었던 이광재 전 강원지사의 피선거권 박탈을 복권해준 것이 정치인 사면의 대표적 사례였다.
게다가 ‘국민 통합’은 이 전 지사 등 앞서 세 차례 이뤄진 특별사면 때도 내세웠던 명분으로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퇴임을 5개월 앞둔 문 대통령이 대선 3개월 전에 전격적으로 단행한 시점을 감안하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청와대는 특별사면에 내년 대선 시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며 개연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선거 관련 고려는 일체하지 않았다. 전혀 그런 것이 고려될 수 없다”며 “선거를 고려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선거랑 연관짓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내년 5월에 퇴임을 앞둔 문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는 신년 특사 3·1절 특사, 부처님 오신날 특사 크게 3차례 있지만 대선을 염두에 둔 전략적 판단은 하지 않았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고위 관계자가 언급한 ‘더 좋은 타이밍’은 대선 직전인 3·1절 특사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 경우 대선 개입의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점, 막판 역풍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신년 특사가 부담이 덜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 관계자는 “(사면을) 객관적으로 기준을 정해놓고 ‘이 기준에 합당하면 지금, 합당하지 않으면 3월’ 이렇게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며 “그런 시기적 선택도 대통령 사면권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서는 향후 대선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이 국정농단을 환기한다는 점, 국정농단 수사를 지휘해 온 윤석열 후보의 입장 등을 고려할 때 대선 유불리 판단에 속내가 복잡한 모양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집권시기에 있었던 국정농단 사건으로 국민께 많은 실망을 안겨드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당 전신 새누리당이 입법부로서 충분한 견제장치가 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국민께 송구하다”며 윤 후보와의 개연성 차단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 전 총리는 앞으로 어떤 정치적 활동을 할지 모르겠으나 정치적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며 문 대통령의 사면 배경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했다.
또 국민의힘에서는 박 전 대통령을 사면하면서 한 전 총리를 복권한 것이 기계적 균형을 맞춘 결과가 아니냐는 의심의 시각을 거두지 않고 있다.
임태희 국민의힘 중앙선대위 종합상황본부장은 이날 CBS 김현정 뉴스쇼 인터뷰에서 “한 전 총리를 사면(복권)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떤 모양새로 할지, 비난 여론을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와 달리 검찰의 부당한 정치 수사로 인해 그 피해를 한 전 총리가 입었다는 게 문 대통령의 확고한 인식이다.
문 대통령은 확정 판결 당시 “진실과 정의가 인권의 마지막 보루가 사법부일 것이라는 기대가 참담히 무너졌다”며 “안타까움과 실망 너머 분통함을 느낀다”고 말했었다.
이러함 때문에 검찰개혁 과제 완수의 관점에서 문 대통령 임기 내 한 전 총리에 대한 사면·복권이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이 꾸준하게 제기됐었다.
실제 문 대통령은 지난 1월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전 대통령과 한 전 총리의 연계 사면 검토 여부에 질문에 “아직까지는 검토한 적이 없다”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미리 말하기 어렵다”는 유보적 답변으로 가능성을 아주 닫지는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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