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발발 ‘초읽기’에 들어간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대(對)러시아 ‘제재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같은 제재 동참을 머뭇거리는 모양새여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3일 기자들과 만나 “주요 서방국들이 대러 제재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며 “우리로서도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상황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의 이 같은 발언은 우리 정부가 ‘대러 제재 동참’을 공식화하지 않으면서 당분간 ‘운신의 폭’을 가져가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 정부의 이런 모습은 지난 2014년 크림반도 사태 때와도 닮아 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서방의 규탄 행렬에 보폭을 맞춰 “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미국 등의 대러 제재 동참 요구엔 뚜렷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러시아와의 고위급 인사 교류 임시 중단 등의 수준에서 수위를 조절했다.
우리 정부가 과거부터 외국에 대한 제재에 ‘소극적’ 행보를 보여 온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 경제구조 자체가 높은 수출 의존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강대국 간 패권 경쟁으로 ‘에너지·자원 무기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는 경향을 정부가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많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10위 교역대상국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특히 자동차·부품이 러시아 수출의 40.6%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 또 수입에선 나프타·원유·유연탄·천연가스 에너지 비중이 70%를 넘는다.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도 주요 요소 중 하나로 꼽힌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중국과 함께 북한의 ‘뒷배’ 역할을 자처해왔다. 지난달 북한의 자칭 ‘극초음속미사일’ 발사 등에 따른 안보리 차원의 ‘공동대응’ 논의에서 러시아가 중국과 함께 번번이 제동을 건 사례가 대표적이다.
러시아가 중국과 함께 뒷배 역할을 자처하는 것과 관련해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특히 올해 들어 북한의 7차례 무력시위, 핵실험·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재개 가능성 시사 등의 과정에서 ‘한러관계 악화’라는 변수가 추가될 경우 우리 정부로선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이 현실화될 경우 우리 정부 또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소극적’ 자세로 관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지적도 많다. 상황에 따라 ‘단계적 계획’ 설정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미국이 크림반도 때와 달리 강도 높은 대러 제재를 시사하고 있다는 점도 미리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 러시아 최대 국책은행 대외경제은행(VEB)과 방위산업 지원특수은행 PSB 및 42개 자회사를 제재 대상에 올렸고 추가 제재 가능성도 시사했다. 일각에선 향후 러시아에 대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배제 조치를 포함해 핵심 기술 품목 수출규제까지 갈 가능성도 점친다.
이 경우 사실상 ‘세컨더리 보이콧’(제재 국가와 거래하는 제3국의 기업과 은행·정부 등에 대해서도 제재) 발동을 염두에 둬야 하는 우리나라로선 원하지 않더라도 대러 제재 대열에 동참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우리가 원치 않지만 상황에 따라 수동적으로 제재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며 “정부가 규범이나 원칙보다 단기적·물질적 이해만을 우선시한다면 이는 중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과 국익 훼손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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