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내 마지막 3·1절 기념사는 새로운 담론과 구체적 제안보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는 원론적 메시지 위주로 채워졌다. 3·1절 기념사의 큰 축을 이뤄왔던 대일(對日)·대북(對北) 메시지 분량은 축소된 반면, 그 빈 자리는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국제질서에 대한 문제 인식으로 대체됐다.
인위적인 한일·남북 관계 회복 의지를 밝히는 것보다는 평화와 협력의 당위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지막 기념사를 마무리 했다. 대선을 일주일 여 앞둔 물리적 시간을 감안한 듯, 차기 정부가 추구해야 할 한일·남북 관계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선에 만족해야 했다.
문 대통령은 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거행된 제103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총 6400자 분량의 기념사 안에 독립의 의미와 임시정부 법통, 분단의 아픔과 한반도 평화, 한일·남북관계 방향성을 담아냈다.
이날 3·1절 기념식은 8·15 광복절과 더불어 굵직한 담론을 제시하는 주요 무대였던 만큼 문 대통령 재임 중 마지막 기념사에 많은 시선이 쏠렸다. 과거 100년을 규정하고, 미래 100년의 비전을 담은 ‘신(新) 한반도 체제 구상’을 제시했던 것도 2019년 제100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서였다.
‘신 한반도 체제 구상’이란 100년 후 미래 한반도의 청사진을 그린 새 국가정책방향이다. 한반도 평화 구상을 담은 ‘쾨르버 재단 연설’을 보완·발전시킨 거대 담론이다. 과거 100년의 근현대사를 통해 내재된 한반도 내 수동적인 냉전질서를 극복하고 능동적인 평화질서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비무장지대(DMZ)에 갇힌 평화가 남북을 넘어 동북아시아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100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처음 언급한 바 있다. 사흘 앞선 2·28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결렬되면서 축소판 형태로 머물렀던 ‘신 한반도 체제 구상’은 3개월 뒤 ‘평범함의 위대함’이라는 제목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FAZ) 기고문을 통해 완성된 담론의 형태를 갖췄다.
문 대통령이 이날 기념사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는 평범함이 모여 위대한 진전을 이룬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역사”라고 규정한 것은 ‘신 한반도 체제’를 환기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대북·대일 메시지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연상케 하는 국제정세를 먼저 언급한 것에서 현재 시선의 중심을 엿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 국제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힘으로 패권을 차지하려는 자국중심주의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며 “신냉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적으로 러시아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팽창주의에 의한 무력 침탈의 문제 인식을 거론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우리에게는 폭력과 차벌, 불의에 항거하며 패권적 국제질서를 거부한 3·1독립운동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며 “3·1독립운동의 정신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주도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침공 속에서도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하고 하는 우크라이나의 불행의 근본엔 스스로의 힘을 갖추지 못했다는 문제 인식으로 풀이된다. 100년 전 약한 국력에 의해 일본에 나라를 뺏겼던 구한말 조선의 아픔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전날 육군3사관학교 임관식에서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 자체가 언제나 엄중한 안보환경이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갖춰야 한다”며 강한 국방력을 강조한 바 있다.
매 3·1절 기념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남북 관계 관련 메시지는 한반도 평화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수준으로 대체됐다. 북측을 직접 거론하지 않은 데에서도 현실적인 관계 회복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우선 우리가 이뤄야 할 것은 평화다. 한국 전쟁과 그 이후 우리가 겪었던 분단의 역사는 대결과 적대가 아니라 대화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의 평화는 취약하다. 대화가 끊겼기 때문”이라며 “평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대화의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고 남북 대화를 위한 의지를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면서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대화와 외교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의 핵심 메시지인 한일 관계에 있어서도 과거사와 미래 관계의 분리 대응이라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일본이 ‘한때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딛고 미래를 향해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한일 관계를 넘어서 일본은 역사를 직시하고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웃 나라 국민의 상처를 공감할 수 있을 때 일본은 신뢰받는 나라가 될 것”이라며 “우리 정부는 지역의 평화와 번영은 물론 코로나와 기후위기, 공급망 위기와 새로운 경제질서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 과제 대응에 함께하기 위해 항상 대화의 문을 열어둘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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