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는 앞으로 5년간 국정운영을 위한 새 그림을 그리기보다 전 정부의 잘못을 찾아내 새 정부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역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정권 교체가 됐든, 연장이 됐든 전 정권의 흔적 지우기에 몰두하면서 정작 인수인계를 통해 새 정부의 밑그림을 탄탄하게 짜는 인수위의 본령을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한국행정학회 국정관리혁신연구회 소속 경희대 강제상 교수, 세종대 서원석 이덕로 교수 등은 대선을 앞두고 역대 인수위와 정부 운영에 참여한 고위 공무원, 정치인, 학자 21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통해 ‘성공하는 정부를 위한 제언’ 연구를 진행했다. 동아일보는 이 연구보고서를 기반으로 10년 만에 닻을 올리는 인수위에서 꼭 다뤄야 할 과제를 짚었다. 공동연구팀은 조만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에 이 보고서를 전달할 계획이다.
○ “점령군처럼 굴지 않아야”
인수위가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것은 고질적인 문제다. 인수인계라는 본연의 업무를 넘어 월권을 하는 행태를 말한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따른 보궐선거로 출범하면서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인수위 역할을 대신했다. 탄핵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작용하긴 했지만 국정기획자문위에선 전임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적폐몰이’가 극심했다. 각 부처뿐만 아니라 국정원, 군에 이르기까지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충분한 검토 없이 각종 정책을 중단시켰다. 관련 업무를 했던 공무원들도 연일 불려 다녔다.
차별화에만 주력하다 보니 정작 정책 내용은 대동소이하고, ‘네이밍(이름 짓기)’만 새롭게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과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 문재인 정부의 ‘혁신 성장’까지 이를 실제 집행하는 부처에선 “네이밍만 차별화할 뿐 실제 정책 차별화가 없다”는 목소리가 매번 나왔다. 전직 고위 공무원 A 씨는 “이명박 정부 때 ‘공정사회’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그 다음 정부에선 ‘공정 말고 다른 거 써라’ 이랬다”면서 “정권이 또 바뀌니 ‘공정 사회’가 다시 등장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당선인이 현직 대통령과 차별화만 앞세웠다가 혼란이 일기도 했다. 2012년 18대 대선 직후 당시 박근혜 당선인은 남북 간 대화와 교류 협력을 통해 북한과 신뢰를 쌓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새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과의 차별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인수위 활동 기간이던 2013년 2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신·구 권력 간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강제상 교수는 “당시 이명박 정부와 박 당선인 측이 상대방의 입장을 의식하다가 3차 핵실험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고 말했다.
○ “전 정부로부터 교훈을 도출해야”
전문가들은 역대 인수위의 시행착오를 막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추고, 현 정부와 차기 정부가 공동 숙의하라”라고 조언한다. 인수위가 현 정권과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하면 차기 정부의 국정운영 동력만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특히 윤 당선인이 역대 최소 표차로 당선된 만큼 인위적인 차별화는 자칫 국론 분열만 불러올 수 있다.
윤 당선인도 이를 염두에 둔 듯 10일 당선 인사에서 “지속적으로 해야 할 과제들은 그렇게 (이어서) 관리하고, 또 새롭게 변화를 줘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원칙을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차별화가 아닌 타산지석으로 삼을 교훈을 도출하는 데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덕로 교수는 “이전 정부의 정책에 대해 평가를 철저히 진행해 성공과 실패의 교훈을 찾아야 한다”며 “결코 비난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부처별로 주요 정책을 평가해 각 3쪽 이내로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평가의 핵심은 새 정부 정책기조와의 연결 지점을 찾는 데 둬야 한다.
당선인과 인수위는 현 정부에서 진행 중인 정책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서원석 교수는 “당선인은 현직 대통령의 업무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칭찬조차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당선인의 말 한마디가 곧 각 부처에 ‘업무지침’으로 여겨지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얘기다.
집권초 핵심공약 실행案 못내면 결국 무산
[체크리스트①]취임 6개월 로드맵 마련
“집권 초에 무엇을 가장 앞세울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꼽는 인수위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새 정부 출범 후 첫 6개월에 대한 로드맵을 짜는 데 주력하라는 조언이다.
국정운영 동력이 가장 강력한 집권 첫해의 행보는 정권 5년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 특히 개혁 과제의 경우 실기(失期)하면 집권 기간 다시 꺼내는 게 쉽지 않다. 이때 집권 첫해 국정운영의 나침반이 되는 게 6개월의 로드맵이다.
실제로 대선 과정에서 내세운 주요 공약이라도 초기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내놓지 못한 경우 무산되는 일이 숱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0일 취임식에서 공언했던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 공약이 대표적이다. 당선 뒤 관련 위원회를 구성해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거친 구상만 가지고 있다가 결국 2019년 1월 파기했다.
전문가들은 인수위에서 성급하게 모든 이슈의 결론을 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보다 취임 후 어떤 체계와 일정으로 이를 다룰지 로드맵을 촘촘히 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덕로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의 핵심의제와 취임 첫 6개월에 대한 로드맵을 정부 출범 직전에 국민 앞에 발표해 효율적, 안정적으로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할 일, 내각이 할 일’ 구분 지어야
[체크리스트②]책임총리-책임장관제 밑그림
책임총리와 책임장관.
역대 대선마다 ‘단골 공약(公約)’으로 등장했지만 어김없이 ‘단골 공약(空約)’에 그치고 만 과제다. 10년 만에 출범하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책임총리와 책임장관제의 기틀을 다지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인수위 단계에서부터 청와대 중심의 국정운영 시스템을 혁신할 방안을 뚜렷이 밝혀 책임총리·장관의 밑그림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달 25일 권력구조 개편을 주제로 열린 대선 TV토론에서 “대통령이 할 일, 총리가 할 일, 장관이 할 일을 구분 짓고, 대통령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에서만 분권형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윤 당선인의 이 말에는 책임총리·장관제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원칙이 잘 담겨 있다. 대통령과 총리, 장관의 업무를 분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기준은 ‘큰 청와대’를 지양하는 것이다. 강제상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은 하위 정책목표의 결정과 집행을 관계 장관에게 맡기고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며 “국정과제 집행 과정을 세세하게 청와대에 보고하는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 한 여권 인사는 “현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전기요금 인하와 같은 이슈까지 대책 마련을 지시하는 등 거의 모든 정책적 사안에 대통령이 전면에 나섰고,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라고 했다.
책임총리와 책임장관이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인수위에서 국정운영 시스템의 구체적인 혁신안을 내놓는 게 중요하다. 국정운영의 중심을 청와대 참모들이 참여하는 대통령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가 아니라 총리, 장관이 참여하는 국무회의로 바꾸는 일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서원석 세종대 연구교수는 “대통령비서실 규모를 줄여 청와대와 정부 간 조정협의체를 간소화하고, 내각 중심의 실용적 국정 운영 체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곧 있을 정부부처의 인수위 업무보고에서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강 교수는 “과거 인수위와 같이 ‘점령군 세리머니’ 성격의 업무보고가 아닌, 인수위 각 분과가 실무적으로 각 부처로부터 보고를 받고 국정과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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