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는 그간 ‘한미동맹 강화·발전’을 외교 분야 최우선 과제로 꼽아왔기에 펠로시 의장의 이번 인도·태평양 국가 순방 계획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이번 펠로시 의장 방한을 ‘끈끈한 한미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할 만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감지돼왔다.
그러나 펠로시 의장 방한이 시작된 이후 분위기는 좀 다르다. 오히려 펠로시 의장의 입국 현장에 우리 정부나 미 의회의 ‘카운터파트’에 해당하는 우리 국회 관계자들이 자리하지 않으면서 ‘외교적 결례’ 논란까지 불거진 상황이다.
이에 대해 관계자들은 펠로시 의장 입국시 우리 측 인사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배경에 대해 “미국 측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우리 국회에선 펠로시 의장 입국 시간에 맞춰 의전 담당자를 입국 장소인 경기도 평택 소재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로 보내려 했으나, 주한 미 대사관 측과의 사전 협의과정에서 “미국 측이 사양했다”는 후문이다.
정부 소식통은 외교부가 펠로시 의장 영접 인사를 보내지 않은 데 대해서도 “‘정부의전편람’엔 국가원수나 행정수반에 해당하는 외빈 영접만 규정돼 있다”며 “국회 측 요청이 있었다면 의전 지원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이번엔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일각에선 관련 규정 유무를 떠나 펠로시 의장이 우리나라에 오기 전 대만을 방문, 미국·중국 간 갈등이 재차 고조된 상황 등을 감안해 ‘의전 협의 등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현재 우리 정부는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상호존중’을 강조하며 중국과의 관계 재정립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 시기 우리 외교가 ‘미중 간 전략적 모호성’ 정책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는 약화되고, 중국에 흔들리는 ‘2중고’에 시달려왔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우리나라의 최대교역국이란 점 등을 이유로 “대(對)중국 정책의 ‘급변경’은 더 큰 혼란과 불안만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적지 않은 상태다.
이와 관련 우리 정부는 “중국과의 고위급 전략적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우리의 대외정책에 대한 중국의 ‘오해’ 소지를 줄여나간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이를 위해 박진 외교부 장관이 당장 이달 중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이 이번 주 여름휴가를 이유로 펠로시 의장을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통화만 하기로 한 것 또한 이 같은 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해 다른 소식통은 “미국 측 역시 우리의 고민을 일정 부분 양해한 게 아닌가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영범 대통령실 홍보수석 또한 이날 브리핑에서 “모든 건 우리 국익을 총체적으로 고려해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일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인도·태평양 국가 순방에 나선 펠로시 의장은 중국 당국의 거듭된 반발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2일 대만 방문을 강행했다.
중국 당국은 펠로시 의장의 이번 대만 방문이 ‘하나의 중국’ 원칙(중국 대륙과 홍콩·마카오·대만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이며 합법 정부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하나라는 것)을 훼손하려는 시도로 간주했다. 그러나 펠로시 의장은 3일 대만 방문을 마치며 발표한 성명에서 “중국은 세계 지도자들이 대만에 방문하는 걸 막을 수 없다”고 직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만일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났더라면 대만 관련 언급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 하원의장의 방한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란 점에서 우리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하원의장의 우리나라 방문은 2002년 데니스 해스터트 당시 의장 이후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현재 우리 정부는 대외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막강한 미 의회와 북한 비핵화 문제 등을 놓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펠로시 의장은 단순히 하원의장이 아니라 전설 같은 여성 정치인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펠로시 의장은 이날 윤 대통령과 직접 만나진 않았으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하면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및 도발 위협에 따른 한미 간 확장억제 강화 등 우리 정부의 노력을 뒷받침하는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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