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에서 수십㎞ 떨어진 고무산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 집을 뛰쳐나올 때의 나이는 7살. 이후 5년 동안 꽃제비로 북한을 떠돌았다. 아버지는 굶어죽고, 형은 북한 교화소에서 죽었다. 김혁 역시 18살에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의 최연소 수감자로 끌려가 죽기 직전에 석방됐다.
석방 전에 함께 입소한 23명 중 21명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무덤도 없이 소각되는 22번째 주검이 될 운명이었지만, 하늘이 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인표 주연의 영화 ‘크로싱’의 11세 소년 ‘준이’의 실제 인물은 몽골 사막에서 김혁이 업고 오던 중 숨진 유철민이다.
올해 40살이 된 김혁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공공기관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생사의 굴곡을 넘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 장마당의 ‘덮치개’
김혁이 함경북도 청진시 수남구역 말음인민학교 2학년을 다니던 1989년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2살 위 형이 불렀다.
“혁이야. 우리 집 나가자. 우리 엄마도 아니잖아.”
혁의 친엄마는 그가 4살 때인 198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1년 뒤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새엄마가 형제들에게 아주 못되게 놀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형은 그녀를 너무 미워했다. 혁이도 그녀가 친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정을 붙이지 못했다.
두 형제는 집을 나와 청진역으로 갔다. 그때부터 구걸하는 삶이 시작됐다. 역에는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구걸하는 청소년들이 있었다. 북한 꽃제비라고 하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 이전부터 기차역에서 빌어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당시 청진역은 ‘청룡파’ 구역이었다. 집을 뛰쳐나온 아이들은 소매치기 전문 조직인 청룡파에 소속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어린 형제를 받아줄 리가 만무했다.
형제는 구걸로 먹고 살았다. 당시만 해도 인심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기차를 기다리며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면 “부모 없냐”고 물었다. “다 죽었다”고 대답하면 사람들이 짐을 열고 도중식사(도중에 먹을 도시락)를 나눠주었다.
하지만 청진역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가끔 안전원(경찰)들이 나타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잡아다 집을 묻고 돌려보냈다. 그들도 자주 잡혔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와서 이들을 데리고 갔다.
집에 가면 호되게 맞고 다시는 가출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는 며칠 뒤 다시 도망치는 삶이 반복됐다. 1년쯤 지나자 청진 역전분주소(역전파출소) 안전원들은 누구나 이들 형제를 알아보았다.
그가 8살 때 형이 “안 되겠다. 우리 여길 떠서 평양에 가자”고 제안했다.
형제는 평양행 열차에 몰래 올라탔다. 열차검열원들을 속이며 그럭저럭 평양 직전의 간리역까지는 갔지만 도무지 검열과 통제가 심해 평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청진으로 오는 기차를 타고 오다가 함북 길주역에 내려 농민시장에서 구걸을 시작했다. 그때 함경북도와 양강도로 가는 기차의 분기점인 길주에는 꽃제비들이 많았다.
안전원이 쫓아오면 도주하는 삶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갈라지면 약속 장소를 정해 다시 만났고, 며칠 동안 떨어져 소식을 정 모를 때면 다시 몇 시간을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와서 만났다.
청진역 대합실에 있는 영예군인방 스팀관 뒤가 형제가 최종으로 만나는 약속 장소였다. 그렇게 그들은 4년을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1993년이 되자 상황이 변했다. 이때엔 전국 곳곳에서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는 지역이 생겨났다. 기차역에 꽃제비가 갑자기 많아졌다. 인심도 박해져 더는 빌어도 잘 주지 않았다. 그나마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은 군인들이었다고 김혁은 회상했다.
빌어먹기 어려워지자 꽃제비들은 훔쳐 먹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부터 농민시장으로 존재하던 장마당이 번창하기 시작했고, 시내 곳곳에 골목장도 많아졌다.
꽃제비들은 음식장사꾼을 노렸다. 장사꾼들도 파는 음식을 덮쳐 달아나는 꽃제비가 많아지자 대책을 세웠다. 음식 그릇 위에 그물을 씌우고, 또 비닐까지 씌운 것.
훔쳐야 먹고 살 수 있는 꽃제비들도 여럿이 모여 역할 분담을 하는 식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힘 좋고, 빨리 달리는 애는 ‘파장꾼’이 됐다. 이들은 음식 그릇을 통째로 바닥에 뒤집어 버리고 도망가면 ‘덮치개’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땅에 떨어진 음식을 두 손으로 쓸어 담아 도망친다. 이렇게 획득한 음식을 약속된 골목에서 나눠먹었다.
# 바람잡이가 되다
1994년 설날이었다.
명절은 꽃제비들에겐 가장 배고픈 날이다. 장마당은 문을 닫고, 기차역도 조용하다. 이날도 김혁은 청진역 대합실 의자에 배고픔을 달래며 누워있었다.
이때쯤 그는 형과 헤어졌다. 14살이 된 형은 키도 커졌고, 달리기도 빨랐다. 안전원이 쫓아오면 형은 늘 도망을 치는 데 성공했지만, 키가 작은 혁은 자주 잡혔다.
그가 잡혀가면 형은 그 사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는데, 그런 일상이 이어지다보니 어느새 각자 알아서 사는 삶이 된 것이다. 형은 전국구로 떠돌았는데, 가끔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청진역에 내려 동생이 잘 있나 살펴봤다.
이날도 혹시 형이 돈을 가지고 청진역에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누워있는데 또래로 보이는 한 아이가 다가 왔다. 옷도 잘 입고 있었다. 혁을 유심히 보던 그는 “야, 세면장 가서 얼굴 씻고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라고 제안했다.
역전 화장실 세면장의 얼음을 깨고 얼굴을 씻고 오자 그 애가 역전 앞 식당에 데리고 들어갔다. 비싼 메뉴도 척척 시켰고, 밥을 먹은 뒤 ‘555’라는 브랜드의 고급 담배도 건네주었다.
“너 이제부터 나랑 다니지 않겠니?”
그렇게 그들은 친구가 됐다. 알고 보니 그 애는 그 바닥에선 소문난 소매치기였다.
당시 여행하는 사람들은 소매치기를 피하기 위해 배낭 안에 돈을 숨기고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그 애는 어느 쌀 배낭 가운데 돈이 숨겨져 있는지를 척척 알아냈다.
개찰구에서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밀고 당기고 북새통이 벌어지면 이들은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혁에게 접근한 것도 ‘바람잡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돈을 훔치면 이들은 며칠 잘 먹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작업하려 나왔다.
친구는 혁이랑 비슷하게 일찍부터 집을 나와 소매치기가 됐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친구는 가끔 큰 돈이 생기면 집에 가서 앓는 어머니에게 주고 왔다.
그러나 이들의 동행은 반년 만에 끝났다. 친구가 군부대 군관의 트렁크를 훔치고 튀었는데 갑자기 안전원들이 총동원돼 그 애를 색출해 잡았던 것이다. 그 트렁크에 군사비밀이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고, 권총이 있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렇게 끌려간 친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반년 동안의 행복한 시절이 끝났다.
# 김일성의 죽음
1994년 6월 혁은 청진역에서 또 안전원에게 잡혔다. 또 아버지가 분주소로 혁을 찾으려 왔다. 집에 가보니 언제 잡혀 왔는지 형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가 “새 엄마가 그렇게 싫냐”고 물었다. 형제는 합창하듯이 “싫어”라고 대답했다.
“왜 싫어?”
“가짜 엄마니까 싫지.”
아버지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몰래 보니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형이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나가지 말자.”
당시 아버지는 531군부대 외화벌이 회사에 다녔다. 집안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7월 8일 아버지는 이들에게 먹이겠다고 생태를 가득 싣고 집에 왔다.
다음날 형이 눈짓을 했다. 둘은 명태 40마리를 몰래 둘러메고 수남장마당에 나왔다. 장사꾼에게 팔아 더 맛있는 것을 사먹을 생각이었다.
애들을 보고 장사꾼들은 가격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팔 곳을 찾지 못하고 시장을 서성이는데 갑자기 장마당 관리사무소 사람이 나와 “중대방송이 있으니 당장 와서 TV를 함께 시청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렇게 떠밀려 TV를 보러 갔더니 김일성이 죽었다는 부고가 방영됐다.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벌어졌다.
“오늘은 명태 팔기 틀렸구나.”
형제는 배낭을 들고 집으로 가려 돌아섰다.
그때 한 장사꾼이 그들 옆에 와서 속삭였다.
“그거 마리당 9원에 살게.”
아까는 3원에 사겠다고 하더니 김일성이 죽었다고 하니 9원을 불렀다. 9원에 명태를 팔고, 장사를 오랫동안 못할 것을 직감한 다른 장사꾼이 떨이로 팔고 가는 월병을 사서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숨겨놓고 먹었다.
혁이의 기억 속 김일성 사망일은 명태를 9원에 팔고 월병을 싸게 산 운 좋은 날이었다.
# 아버지의 죽음
형제가 집으로 들어온 뒤로 아버지는 더는 때리지 않았다. 1995년 1월 아버지는 외화벌이 회사를 그만두고, 청진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어촌마을 부업지로 두 형제와 함께 옮겼다. 자식을 위해 새엄마와 떨어져 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그들은 이곳에서 1년 동안 살았다. 집이 없어 우사를 개조한 허름한 곳에서 살았지만, 이때가 혁의 기억 속에서 가족과 함께 했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염소도 기르고, 소도 방목하고, 농사도 했으며 인근 호수에서 잉어도 잡았다.
마을에는 해군 공기부양정 7~8대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부대 군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혁의 부친은 젊었을 때 전연군단(전방군단)의 정찰부대 교관을 지냈다고 한다. 대남침투도 했다고 하는데, 어린 혁이는 아버지의 공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몰랐다. 다만 아버지에겐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시계가 있었다. 북한에서 명함시계가 있다는 것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란 것을 의미한다.
혁이는 어렸을 때 분주소에 잡혀온 형제를 데리러 온 아버지가 일부러 명함시계를 차고 오자 안전원들이 아버지 앞에서 굽실대며 태도가 변했던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해군 부대에 가서 군인들에게 격술 시범동작을 가르치자 군인들은 접근 금지 구역까지 이들 형제에게 개방해주었다.
혁은 가끔 바다에서 문어를 잡아 시내에 나가 팔았다. 그렇게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술을 사다 드리면 아버지는 너무 행복해 했다.
형제는 그렇게 오래 살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는 고난의 행군으로 자고 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였다. 아무리 외진 어촌마을이라 하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그해 12월 도저히 형제를 기를 능력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들을 함북 온성군에 있는 종성고아원에 보냈다.
그 다음해 봄 아버지는 새엄마와 이혼했다. 친자식들을 고아원에 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했다고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시내에 있는 집을 팔아 일부는 새엄마에게 주고, 나머지 돈으로 수남장마당 뒤쪽의 작은 집을 샀다.
1996년 여름 방학에 집에 갔을 때 아버지는 뼈에 가죽만 씌운 모습이었다. 180㎝가 넘는 장대한 기골이었는데, 걸음도 겨우 걸었다.
그래도 아들들이 왔다고 집에 있던 마지막 옥수수 가루를 탈탈 털어 죽을 쑤었다.
“서로 때리지 말고, 싸우지 말고, 훔치지 말고 살아라.”
혁이 기억하는 아버지 마지막 당부였다.
아버지가 형제가 방학이 끝나 고아원으로 돌아간 지 몇 달 안돼 굶어죽었다. 너무 고지식하고 노동당에 대한 충성 밖에 몰랐던 아버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간부들이 공공 자산을 몰래 훔쳐 팔아먹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간부들과 다투다 결국 직장도 쫓겨났고, 당의 방침과 어긋나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국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결국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죽기 전에 아버지는 말음1동 동사무소 당비서를 찾아가 당증과 명함시계, 예비역 군관 자격증을 당에 바쳤다.
혁이는 나중에 형과 함께 아버지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시계를 찾으려 당비서가 있는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당비서도 굶어죽었던 것이다.
#종성고아원
형제가 처음 갔을 때 고아원에는 200여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자가 줄어들었다. 원래 방침대로라면 고아원엔 우선적으로 식량이 공급돼야 했다. 하지만 비상창고에도 없는 식량을 간부들이 만들어 줄 순 없었다.
고아원에선 옥수수를 털어내고 남은 ‘송치’와 벼 뿌리를 가루내 여기에 약간의 옥수수 가루를 섞어 죽을 만들어주었다.
큰 애들은 도망을 쳤다. 선생들도 눈을 감아주었다.
하지만 어린 애들은 갈 곳도 없었다. 가뜩이나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에서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옴 등의 질병이 쉬지 않고 퍼졌다.
1997년 여름방학 때 집에 갔다 고아원에 돌아오니 70여명 밖에 남지 않은 학생 중에 20여명이 그새 죽어 있었다. 죽은 애들은 고아원 뒷산의 살구나무 밭에 봉분도 묘비도 없이 묻었다.
고아원에 간 뒤로 형은 계속 도망쳐 떠돌아 다녔다. 혁이도 자주 도망쳐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다가 고아원에 다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 형은 1997년 졸업해 종성식료공장 원료기지라는 곳에 배치를 받았다. 형은 몇 달도 있지 않고 사라졌다. 혁이 역시 만 15세인 이듬해 졸업해 무산군 임업사업소 종성지부 풍계리 작업장에 배치됐다. 산에 올라가 갱목으로 쓸 나무를 베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혁명과업이었다. 자라면서 전국을 떠돌던 그에게 깊은 산속에서 해야 하는 힘든 일이 맞을 리가 없었다. 몇 달 있다가 도망쳐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고아원 교직원의 개인 밭 경비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알게 된 10여살 많은 누나가 두만강 건너 중국에 가면 옥수수가 지천에 널려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야간 경비를 서려 나왔다가 맞은 편 강을 넘어 중국에 갔다. 정말 밭에 옥수수가 엄청 많았고, 경비도 없었다. 그는 배낭에 옥수수를 잔뜩 따서 넣고 다시 두만강을 넘어왔다. 그게 혁의 첫 도강이었다. 당시엔 국경경비대도 많지 않았고, 종성에서 살았던 혁을 의심하던 사람도 없었다.
누나는 가끔 중국 주소를 알려주며 그곳에 가서 물건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약속도 잘 들어주었다. 어느새 그는 두만강을 어렵지 않게 넘나드는 도강꾼이 됐다.
한번은 형이 찾아왔다. 중국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후 소식이 없어졌다. 중국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8년 11월 혁은 보위부에 체포됐다. 중국을 오가며 사귄 조선족 청년들이 청진이란 도시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다. 혁은 겁도 없이 여럿 데리고 나와 청진을 구경시켜주다 잡혔다. 중국 청년들은 혼을 내서 다시 중국에 돌려보냈지만 혁은 수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를 신고한 사람은 중국을 처음 알려준 그 누나였다. 안전부에선 그녀를 잡으려 오랫동안 주시를 해왔는데, 그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보위부에 자수하면서 혁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렇지만 누나가 산 것은 아니다. 그녀도 6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죽었다.
#3년형을 선고받다
그는 군 안전부에 끌려가 재판을 받은 이듬해 9월까지 무려 10개월 동안 구류장에서 보냈다. 체포될 때 그의 나이는 만 16세였다.
이듬해 판결을 받을 때 “저는 형법에 규정한 처벌 나이인 만 17세도 안됐는데 왜 형을 받아야 하냐”고 묻자 안전원이 “만 14세 이상이면 누구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1999년 9월에 17세였던 혁은 비법월경죄 1년, 화폐매매죄 1년, 밀수죄 1년을 더해 합계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달 그는 판결을 받은 7명과 함께 온성 안전부 구류장을 나와 전거리교화소로 끌려갔다. 그런데 교화소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허약환자를 받아줄 순 없다는 것이다. 10개월 구류장에서 지내다보니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함께 호송된 7명 중 2명만 교화소 입소에 ‘합격’하고 허약에 걸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된 나머지 5명은 다시 온성 구류장으로 재송환됐다.
온성 구류장에서 전거리까지 기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었지만, 당시엔 기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아 오가는 데 며칠 걸렸다.
5명 중 2명은 돌아오던 길에 열차 안에서 죽었다. 감옥에 와서 다시 한 명은 희망이 보이지 않아 그냥 먹지 않고 삶을 포기했다. 다른 한 명은 돈 많은 친척들을 둔 재중 교포 출신이었는데, 온성으로 돌아오자 뇌물을 잔뜩 써서 석방됐다. 그런데 그는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감옥에서 굶주리다 집에 간 뒤 음식 조절을 못해 죽은 것이다.
혁이 돌아오자 온성 안전부도 골치가 아프게 됐다. 언제까지 가둬둘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안전원들은 다른 수감자 가족이 면회를 오면 그 음식을 빼앗아 혁이에게 먹였다. 그는 12월에 다시 전거리로 향했다. 이번엔 합격이었다. 그가 들어가던 날 온성과 무산군에서 호송돼 온 23명이 함께 전거리교화소에 입소했다.
#전거리교화소
교화소에 입소하면 제일 먼저 신입반에 배정된다. 교화소에선 가뜩이나 부실한 음식을 다시 급수별로 나눠주는데, 신입반은 제일 양이 적은 4급 밥을 준다.
끌려오기 전에 오랜 감방 생활로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4급 밥을 먹으며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되면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신입반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다. 2000년 8월까지 그와 함께 입소한 23명 중 21명이 8개월 안에 죽었다. 죽으면 ‘불망산’이라 불리는 교화소 내부 산에 대충 묻어버린다. 가족에겐 통보도 되지 않는다.
신입반을 마치고 그는 상하차반에 배치됐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오면 그걸 싣고 부리는 일이었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 그는 감시병 임무를 맡았다.
산에 올라가면 도망을 칠 우려 때문에 나무를 베는 와중에도 5분마다 번호를 부르게 하는데, 그 번호를 부르게 하고, 종합해서 계호원에게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그렇다고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무도 함께 벌목했다.
한번은 늦게 내려오다 개머리판에 맞아 정신을 잃은 일도 있었다. 눈을 떠보니 탈출 의심자로 독방에 끌려갔는데, 5일 정도 있더니 그래도 내려오긴 내려왔기 때문이라며 석방했다.
8개월 뒤 혁은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석방 뒤 몸무게는 대략 35㎏ 정도였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아 백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아 김정일이 광폭적인 대사면을 해주라고 지시한 것. 혁은 사면 대상자가 돼 7월 6일에 석방됐다.
그는 나오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갔다. 2000년 8월 11일이었다. 중국에 가서 청진으로 데려갔던 친구의 집에 가서 의탁해 몸을 회복시켰다.
한 달 정도 있다가 연길로 들어가 농사하는 집에서 일감을 찾았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을 때 형이 찾아왔다. 형은 벌써 중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형은 어느 교회 사역장에 들어가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가끔 한국 사람들도 찾아와서 돈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방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오금이 쑤셔 큰 도시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형의 죽음
중국에 살던 중 혁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간다는 사람을 만났다. 혼자만 갈 순 없었다. 형에게 연락해 오게 했다. 그들이 출발하기로 된 날은 2001년 7월 1일이었다.
그런데 직전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장길수 가족이 6월 26일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해 한국행을 요구한 것.
그들 가족은 무사히 한국에 왔지만, 그런 큰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숱한 탈북민이 피해를 본다. 2002년 3월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집단 진입했을 때도 북중 국경에선 검거선풍이 벌어져 수천 명의 탈북자들이 체포돼 북송됐다.
세계적 주목을 받는 탈북자 집단 진입을 기획한 한국인들은 그것을 내세워 인권운동가로 자처하며 서울에서 살지만, 그 뒤엔 그런 사건 여파로 영문도 모르고 잡혀 비명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탈북민이 생겨나는 것이다.
장길수 가족의 진입 직후에도 공안은 대대적인 탈북자 색출에 나섰다. 아무 것도 모르고 6월 28일 형을 데리러 갔던 혁은 이틀 전에 형이 공안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에 와서도 형의 소식을 수소문했는데, 전거리교화소에 끌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9살 때부터 전국을 누비며 그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던 형이지만, 교화소에서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앞서 전거리교화소에서 지옥을 경험했던 혁은 형이 왜 죽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형은 저랑 달리 키도 크고 체격이 좋았어요. 그런 곳에선 체격 좋은 사람이 살아남기 힘들어요.”
아마 형이 끌려갔던 시기엔 정주년을 맞은 기념일도 없어 사면령도 내려지지 않았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형이 체포됐다고 해서 일행이 모두 지체할 순 없었다. 혁은 7월 1일 몽골 국경을 향해 떠났다.
# 철민의 죽음
몽골 국경과 인접한 도시에 갔는데, 사고가 터졌다. 안내해 주기로 한 사람이 전날 체포된 것.
안내자를 잃은 이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왕 여기까지 온 바에 국경을 넘자고 결심했다.
일행은 모두 5명이었다. 혁이와 11살 철민이. 2살짜리 아이를 업은 젊은 여성과 다른 젊은 탈북 남성이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여성과 남성은 결혼해 또 애를 낳았다. 그러나 여성은 2015년경 사망했다. 도색을 하는 일자리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독성에 중독된 것이다.
일행은 몽골 국경을 향해 사막에 들어섰다. 아무리 걸어도 국경 철조망이 나오지 않았다.
7월 5일 밤 8시에 출발해서 새벽 6시까지 10시간쯤 걸으니 집이 나왔다. 들어가 보니 한족 집이었다. 급히 도망쳤는데 한참을 가서 보니 신고를 받은 공안이 출동했다. 일행은 다음날 아침이 되자 해를 보고 방향을 정한 뒤 다시 사막을 걸었다.
마침내 철조망이 나왔다. 상당한 간격을 두고 철조망이 모두 4개나 있었다. 이걸 다 넘자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7월의 몽골 사막은 익어죽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 더위에 신기루까지 나타났다. 집인 줄 알고 한참을 갔지만 그냥 바위였고, 철길이 보여 갔는데 역시 그냥 사막이었다.
몽골국경을 넘어 사막에서 헤매기를 몇 시간째. 그의 손을 잡고 잘 따라오던 철민이 끝내 어느 바위 밑에 쓰러졌다. 신발을 잃어버려 옷을 벗어 발을 감싸주며 데려왔는데 어린 나이에 끝내 한계를 넘은 것이다. 일행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대로 죽는가 싶어 쓰러져 있던 찰나 혁의 눈에 멀리 집 같은 것이 보였다. 다른 방향에는 오아시스도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헛것이 보였나 싶었지만, 포기 할 수는 없는 일. 혁이 나섰다.
“다 같이 갈 필요가 없으니 젊은 내가 먼저 가보고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정신을 겨우 가다듬고 몸을 질질 끌고 먼저 집을 향해 내려와 보니 기적적으로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 나타났고, 그 옆에 빈집(게르)이 있었다. 그곳은 몽골 국경수비대 초소였다. 초소 안에는 돌 항아리에 담긴 물과 보온병도 있었다. 혁은 빈 병에 물을 채우고 일행에게 돌아왔다. 물을 마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럼 저쪽 오아시스엔 내가 가볼게.”
이번엔 여성이 오아시스로 내려갔다. 오아시스에 다다른 여인은 손을 흔들었다. 물이 맞다는 신호였다. 혁과 남성은 애기와 철민을 데리고 오아시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민이 자꾸 주저앉았다.
“애기를 먼저 데리고 내려 가고, 내가 다시 올라와 철민이를 업고 갈게.”
혁과 남자, 애기가 먼저 오아시스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여성이 적신 옷을 들고 올라왔다.
“철민이는요?”
“힘들어 저기 누워있어. 적신 옷을 씌워주고 기다려. 내가 다시 올라갈게.”
오아시스에 이른 혁은 애기를 돌보고, 형이 다시 철민이를 데리려 올라갔다.
한참 있다가 형이 철민을 업고 내려왔다. 그런데 손이 축 늘어져 있었다. 주저 앉아있던 사이 숨을 거둔 것이다.
오아시스에서 이들은 철민의 몸을 물로 씻어주고 그 옆에 쓰러졌다. 더 갈 힘이 없었던 것이고, 여기에 있다 보면 몽골 수비대가 나타날 것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 실제로 오후 5시쯤 됐을 때 군인들이 나타났다.
몽골 군인들이 장례를 몽골식으로 할 건지 한국식으로 할 건지 물었다.
그들은 한국식으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수비대 병실 근처에 철민을 묻었다. 흰 백포에 철민을 싸서 묻고 봉분을 만들었고, 술도 부었다. 다음날 이들은 수도 울란바토르로 향했다. 그러나 곧바로 오진 못했다. 도중에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그걸 조사하느라 두 달이나 더 걸렸던 것이다.
# 노래 때문에 정착한 부여
2001년 9월 13일 마침내 혁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공항에 총을 든 군인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이틀 전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했던 것이다.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을 거쳐 12월 12일 그는 충남 부여에 정착했다.
하나원 시절 “어디로 가고 싶냐”는 질문에 한국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그는 답변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북한에서 봤던 ‘민족과 운명’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그 영화에서 ‘부여’라는 이름의 작자 미상의 노래가 나오는데, 백마강이라고 보여주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기억에 남았다.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 백제의 옛 서울 찾았더니 /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 바람은 예대로 부는구나”라는 가사를 불러주니 그게 부여라며 부여로 보내주었다.
부여로 가자마자 한국을 실컷 구경하려고 3개월을 떠돌아 다녔다. 다녀보니 정착금으로 받은 1000만 원이 금방 사라졌다. 돈을 벌기 위해 아이스크림 유통업체에 들어갔다. 새벽 4시반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해 한 달에 60만 원을 벌었다. 8개월 열심히 일했더니 병을 만나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그때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돈 쓰긴 쉬워도 벌기는 너무 어렵구나.”
#박사가 되다
한국에선 아무 기술도 없이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혁은 충남 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해 자동차학과를 1년 동안 다녔고, 마침내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이후 부여 자동차정비업체에 취직해 1년 반을 다녔는데, 주변에서 “젊었으니 대학에서 공부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2006년 그는 상경해 카톨릭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혁은 평생 공부를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나름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1학년 성적은 1.87이 나왔다. 통일부에선 이런 성적이면 장학금을 끊겠다고 했다.
“애기가 어떻게 옥수수밥을 먹겠습니까.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사정사정해서 1년을 더 지원받기로 했다. 2학년 성적은 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는 기준인 2.5를 넘었다. 기숙사에 살면서 돈도 벌어야 했다. 강남에 가서 식당 알바도 하면서 용돈을 충당했다. 4학년 때 그는 4.5점 만점에 3.75를 받았다.
한 교수가 “가장 부족한 상황에서 입학해 가장 많이 발전한 사람”이라고 소개해주었을 때 성취감으로 뿌듯했다.
2010년 마침내 그는 대학 졸업생이 됐다. 대학 시절 만난 서강대 김영수 교수가 그가 걸어온 삶을 듣더니 자기 대학에 와서 대학원까지 공부하라고 권했다. 그는 내친 김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공부는 쉽지 않았다. 낮에는 일반대학원 수업을 듣고, 밤엔 특수대학원 수업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2012년 석사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원을 마친 그는 충남 통일교육센터 전문 강사로 취직했다. 각종 학회를 다니며 열심히 참가했더니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교수가 박사 과정을 제안했다. 그는 2014년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학위는 쉽지는 않았다. 치아까지 녹아내려 임플란트를 심을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다.
2019년 마침내 ‘북한 꽃제비 형성과정과 체제로부터 이탈’이란 제목의 박사 논문이 통과됐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던 그가 한국에서 마침내 박사가 된 것.
졸업 이후 경남연구원에 취직해 남북교류협력센터장을 지냈고, 2년 계약 기간이 끝난 뒤 2021년 한국농어촌공사 연구원으로 취직해 지금은 북한 농업기반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2019년 그는 통일교육센터에서 일할 때 간사로 만난 여성과 7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올해 딸을 얻었다. 박사 논문을 쓰는 내내 곁에서 기다려준 아내가 지금도 너무 고맙기만 하다.
#함북 지사의 꿈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학문의 길로 이끌어준 김영수 교수와 이완범 교수는 그가 꼽는 가장 큰 은인이었다.
아무 연고가 없을 때 자동차정비회사에서 만난 장명기 형도 잊지 못할 은인이다.
“그 형을 만나 제가 입에 달고 있던 쌍욕을 끊었어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고객들 앞에서 머리 숙여 사과하고, 분해서 씩씩거릴 때면 뒤에 가서 다독여주었죠.”
그의 결혼식 때 엄마가 앉는 자리에 장명기 형의 엄마가 대신 앉았다고 한다. 기름값이 아까워 떨고 있을 때 자기 집에 와서 살라고 하던 분이었다고 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도 자신에게 인권의 개념을 처음 심어준 엄마 같은 분이라고 했다. 혁이에게 아동인권의 가장 큰 피해자임을 인식시켜주고, 당당하게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지금까지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
가톨릭 동창들도 잊을 수 없다.
“김수현이란 여자 동기가 있어요. 부모가 장애인이고, 공부하는 와중에 동생들 용돈도 자기가 아르바이트해서 벌어 주어야 하는 정말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죠. 그런데 그런 친구가 월드비전에 고아를 지원하라고 기부하고 있더라니까요. 충격을 받았죠.”
그걸 보고 김혁도 2006년에 월드비전에 가입해 지금까지 몽골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제가 몽골이 아니면 여기 올 수 없었잖아요.”
지옥 같은 북한의 삶을 끊어내고 한국에서 얻은 새 삶은 만족스러울까.
“여기도 너무 빡세요. 북에선 먹을 것만 고민하고, 생존이 곧 먹을 것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 스스로 만들어야 하죠. 그런 선택이 저에겐 너무 힘들어요. 아마 모든 탈북민들이 같은 고민일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린 선택이 쌓여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은 선택은 어렵지만 노력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회죠.”
그래도 가정을 가진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집이 충청남도에 있어 전남 나주를 오가는 주말부부로 살지만 딸까지 태어나니 가족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이 생긴다고 했다.
통일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자 그는 대뜸 “함경북도 도지사요”라고 대답했다. 고향에 돌아가 고향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드는 것이 그의 평생의 목표이다.
“정말 고생 많이 하고 살았지만, 이게 끝인가 하면 또 저게 나타나고, 저걸 넘으면 그게 또 시작이더군요. 그렇지만 어떻게 온 길입니까. 늘 버티고 버티자 마음 속 다짐을 하고 그렇게 평생 살아갈 겁니다.”
북한에서 7살 때부터 꽃제비가 돼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다른 체제에서 박사까지 이뤘으면 남들이 평생 오르기 힘든 산에 올랐을 법도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제 겨우 40살이다. 인생을 절반 밖에 살지 않은 것이다. 그가 앞으로 목표라는 산의 어디까지 오를지 알 수는 없다. 산의 정상 어디쯤에서 함북도지사라는 꿈과 만나는 날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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