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서 대량 수주라는 개가(凱歌)를 올린 K2 흑표 전차에 대한 세계 바이어들의 관심이 심상치 않다. 최근 방산업계에선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의 K2 전차 대량 도입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모로코가 현지 면허생산을 추진 중이라는 소문도 흘러나온다.
이런 관측에 대해 K2 전차 제작사인 현대로템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일축하고 나섰다. 다만 모로코가 알제리에 맞서 신형 전차 도입을 추진 중인 것은 사실이다. K2 외에는 이렇다 할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서 가까운 시일 내 모로코의 K2 도입설은 ‘사실무근’에서 ‘유력’ 또는 ‘성사’ 소식으로 바뀔 수도 있다.
‘움직이는 포대’ 존재감 과시한 전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방산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특히 현대전에서 전차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 계기가 됐다. 그간 주요 선진국은 현대전엔 전차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갑전력을 차륜형 장갑차로 재편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차는 비용 대비 효과가 떨어지는 구시대적 무기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차는 대평원의 전투와 시가전에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움직이는 포대(砲臺)’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물론 양국 기갑전력이 모두 준수한 전과를 올리는 것은 아니다. 당초 러시아는 전차 전력에서 우크라이나에 압도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잘못된 운용술과 전차병의 역량 부족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개전 후 6개월 동안 약 2000대 전차를 잃을 정도로 졸전을 벌이는 처지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주력 전차 T-80BVM이나 T-72B3보다 훨씬 낙후된 T-64BV 전차로도 선전(善戰)하고 있다. 일부 전투에선 현대 전차전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가령 개전 초 키이우 동쪽 ‘노바 바산 전투’에선 우크라이나군 T-64BV 전차 1대가 14대의 러시아군 전차와 장갑차를 파괴하는 장면이 공중 드론을 통해 생중계됐다. 격전지 마리우폴에선 우크라이나군 전차 2대가 러시아군 1개 대대전술단(BTG)의 진격을 반나절 이상 저지했다. 적절한 훈련으로 전술만 잘 다듬으면 현대전에서 전차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우크라이나 전황을 매일 분석하는 세계 군 당국은 현대전과 미래 전쟁에서 전차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동유럽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가 그간 미뤄오던 전차 전력 현대화 사업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
시장이 요동치면서 방산업계의 선수들도 본격적인 판촉 활동에 나섰다. 현재 수출시장에서 주목받는 모델은 한국 K2 전차를 비롯해 미국 M1A2 에이브람스(Abrams), 독일 레오파르트 2A7+(Leopard 2A7+), 프랑스 AMX-56 르클레르(Leclerc), 영국 챌린저3(Challenger 3), 중국 VT-4, 러시아 T-90M 등 7종이다. 전통의 전차 명가 독일을 제외하면 모두 강력한 국제적 영향력을 가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생산하는 주력전차다. 하나같이 각 생산국이 주력전차로 운용 중이거나 세계 여러 나라에 대량 수출된 명품들이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이 한국 K2 전차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전차의 핵심 열화우라늄 포탄·장갑
미국 M1A2는 걸프전에서 맹위를 떨친 M1A1의 개량형이다. 현재 M1A2D SEP v4 모델까지 개량이 이뤄졌고, 올해 10월 차세대 에이브람스 모델이 새로 등장할 예정이다. 미군이 사용한다는 프리미엄 덕에 세계 최강 전차라는 평가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군 사양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미군 M1A2 전차의 장갑재와 포탄 관통자는 열화우라늄(Depleted Uranium: 감손우라늄)을 사용한다. 원자량이 커 밀도가 대단히 높은 물질이다. 열화우라늄 장갑은 보통 장갑재와 비교하면 같은 두께로 2배 이상 방어력을 발휘한다. 전차 포탄에 쓰일 경우 텅스텐을 사용하는 동급 포탄보다 20~30% 이상 높은 관통력을 낸다. 미군 사양 M1A2의 구체적인 공격력과 방어력은 기밀이지만, 다른 나라 것보다 포신이 짧은 44구경장(口徑長: 총포 구경 단위로 나타낸 총포신 길이) 120㎜ 활강포에서 쏘는 M829A4 날개안정분리철갑탄(APFSDS)의 관통력이 90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면 방어력은 균질압연강판(RHA) 화학 에너지탄 피격 기준 1400㎜ 이상이라고 한다.
문제는 열화우라늄 대신 텅스텐 포탄과 일반 복합장갑을 사용하는 수출용 M1A2의 성능은 미군용보다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미국의 최신 수출용 APFSDS인 KE-WA2는 M829A4와 같은 조건으로 발사될 때 관통력이 595㎜에 불과하다. 스웨덴 육군 시험평가 결과에 따르면 장갑재의 방호력도 화학 에너지탄 피격 기준 900㎜ 이하였다. 예멘 내전에 투입된 사우디아라비아군 소속 에이브람스 시리즈 전차가 여러 차례 격파된 이유다. 미국은 자국군 전차가 열화우라늄 소재를 활용해 충분한 공격력·방어력을 확보했기에 주포 및 장갑재를 개량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곧 공개될 차세대 에이브람스에도 공격력 강화를 위해 주포 포신을 연장하거나 고성능 신형 장갑재를 도입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수출용 M1A2의 스펙으론 러시아 T-90M이나 중국 99식·96식 신형 전차와 대등한 전투가 어렵다. 그럼에도 대당 가격은 200억 원이 넘고 기술이전, 면허생산 조건도 까다롭다. 폴란드가 미국과 관계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도입한 것을 빼곤 최근 몇 년간 해외 수주 실적이 없다시피 하다.
납기 지연 심각한 독일 레오파르트 2A7+
한때 서방 전차 시장을 평정해 ‘세계 표준’으로 평가된 독일 레오파르트 2 시리즈는 어떨까. 최신 개량형 레오파르트 2A7+는 M1A2보다 경쟁력이 더 떨어져 보인다. 독일은 방산 수출에서 특유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잣대로 삼는다. 무기 수출 심사 과정에서 구매국의 도덕성을 자기네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어지간한 나라는 독일제 무기를 사겠다고 제안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입장벽이 높다. 사우디가 16조 원을 들여 독일제 전차 800대를 구입하려 했으나 독일은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워 거부한 바 있다.
레오파르트 2A7+의 높은 가격과 유지비도 간과할 수 없다. 해당 전차는 독일군 도입 가격이 1500만 유로(약 203억 원)에 달한다. 그마저도 전차의 핵심 옵션인 능동방어장치(APS)와 일부 전자 장비를 뺀 가격이다. APS를 달고 기술이전, 면허생산 등 조건을 추가하면 대당 가격은 300억 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K2 전차 풀옵션 사양의 2배가 넘는 가격이다. 느려터진 생산 속도 역시 문제다. 독일군은 2017년 1월 기존 레오파르트 2A4 차량을 A7 버전으로 개량하는 계약을 제조사 KMW와 체결했다. KMW가 초도 물량을 독일군에 납품한 것은 3년 가까이 지난 2019년 10월이었다. 2016년 발주한 A7+ 신규 생산 차량은 계약 체결 후 44개월 만인 2021년 독일군에 인도됐다. 최근 독일로부터 전차, 장갑차를 구매한 나라는 대부분 납기 지연을 겪는다. 독일제 기갑차량은 초도 물량 인수에 4~5년, 계약 물량 완납까지 7~10년 이상이 걸린다. 글로벌 공급망 교란이 심해진 지금은 납기가 얼마나 더 지연될지 모를 일이다.
미국, 러시아에 이은 무기 수출 대국 프랑스의 전차 모델도 살펴보자. 프랑스의 AMX-56 르클레르는 1993년 배치 후 30년 가까이 이렇다 할 성능 개량이 없었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개발하는 차세대 전차로 대체될 예정이라 관심을 보이는 나라가 거의 없다. 프랑스 외에 르클레르를 도입한 나라로는 아랍에미리트(UAE)가 있다. UAE가 2020년 요르단에 르클레르 전차 80대를 무상 기증한 것을 보면 카탈로그 데이터와 달리 운용상 만족도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당초 프랑스군은 르클레르 전차를 1500대 양산할 계획이었으나 실제 생산 물량은 자국군 250대, UAE 수출용 450대에 그쳤다. 결국 도입 단가와 유지비가 크게 늘어나 현재 40% 수준의 가동률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낡고 비싼 데다, 가동률도 떨어지는 전차가 수출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턱이 없다.
다른 대안인 영국의 챌린저3 전차는 ‘무늬만 영국제’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주포와 사격통제장치, 장갑재 등 핵심 구성품이 독일제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레오파르트 2A7+처럼 가격이 비싸고 납기가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 독일이 개입해 수출 승인이 까다로워질 공산도 크다. 영국은 챌린저3 전차 수출을 폴란드에 제안했으나 폴란드는 거의 고려조차 하지 않고 K2를 택했다.
이렇게 되면 세계 방산 시장에서 남는 선택지는 러시아 T-90M과 중국 VT-4뿐이다. T-90M은 카탈로그 데이터만 보면 세계 최강의 3.5세대 전차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병 휴대용 경대전차로켓에 파괴되는 굴욕으로 명성이 바닥에 떨어졌다. 당초 T-90M 500대 이상을 구매하기로 한 이집트가 K2 전차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무엇보다 T-90M을 구매하면 러시아와 무기를 거래하는 국가에 적용되는 미국의 제재를 각오해야 한다. 미국은 2017년 튀르키예(터키)가 러시아로부터 S-400 지대공미사일 도입을 강행하자 ‘적대세력 통합제재법(CAATSA)’을 마련해 러시아, 이란, 북한제 무기 구입국에 제재를 가하고 있다.
러 전차, 기대 이하 성능에 국제 제재 우려도
중국 VT-4는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라는 사실 자체가 핸디캡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차의 신뢰성은 매년 러시아에서 열리는 ‘탱크 바이애슬론’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동 간 사격 능력이나 야간전투 능력, 주포 공격력과 방어력 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을 받는 실정이다. 파키스탄은 당초 VT-4 전차 300대를 구매하기로 했으나 1차 도입분 176대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추가 구매를 포기했다. 중국 전차의 성능에 실망한 나머지 우크라이나 T-84 오플롯-M 전차 구매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주요 강대국이 내세운 전차들은 가격과 성능, 납기 일정 등에서 한계를 보인다. 신형 전차를 구매하려는 세계 각국 시선이 K2 전차로 향하는 이유다. K2 전차는 소요 국가들이 요구하는 거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모든 전차를 압도하는 공격력과 방어력은 기본이고, 온대·냉대·사막 등 모든 환경에서 검증된 신뢰성까지 갖추고 있다. 우수한 가격 경쟁력과 기술이전 가능성, 구매자의 요구에 맞춘 빠른 납품 등 시장 경쟁력도 뛰어나다. 이제 관건은 외교력이다. 기업의 활발한 판촉과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뒷받침되면 흑표(black panther)는 3600대 생산량으로 한때 서방 세계의 표준 전차로 군림한 독일 표범(leopard)을 능가하는 글로벌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 국산 K2 흑표 전차가 세계 무기체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날이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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