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고단하게 하고 배고프게 하며 동요시켜라” [한반도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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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년 10월 24일 11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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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유튜브 라이브 ‘중립기어’ 10월21일자
김정은, 9.19 합의로 시간벌었다! 우리가 ‘파기 선언’ 해야 하나(링크)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정상화된 것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훈련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실제 전쟁 상황에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장애물들을 군이 평시에 경험하고 대비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프로이센의 군사전략가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On War)에서 설파했다.
“평화 시의 기동작전은 진짜 전투 경험의 약한 대체제이지만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훈련보다는 부대에 이점을 줄 수 있다. 기동작전을 계획하는 것은 경험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장점이 더 많다. 작전에 포함된 마찰의 요소들은 장교들의 판단력과 상식과 결단력을 단련한다.” -Clausewitz, Carl von, On War, ed. and trans. by Michael Howard and Peter Pare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p. 122.

우선 ‘마찰’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로 ‘friction’으로 정의되는 마찰은 군사전략 분야로 좁혀 말하면 ‘전쟁에 나선 장군이 생각한대로 전쟁이 흘러가도록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전쟁에 나선 장수가 행군에 10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먼 곳에 있는 공격에 나선다고 치자. 10일치 군량을 마차에 실어 가다보면 뜻하지 않게 비도 오고 진창에 마차 바퀴가 빠져 행군이 중단되는 이른바 ‘마찰’이 발생한다. 행군은 이틀이나 늦어지고 군량은 모자라 굶는 병사가 생기게 된다. 충분한 진격훈련으로 ‘마찰’에 익숙한 장군은 이에 대비해 행군 기간을 미리 12일로 이틀 넉넉하게 잡고 군량도 그에 따라 늘리며 무엇보다 여분의 마차 바퀴를 마련해서 싣고 가게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화성-12형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도발 대응 차원에서 군이 4일 밤 강원 강릉 모 공군기지에서 발사한 현무-2C 지대지 탄도미사일이 낙탄한 사고는 우리 군에 중대한 ‘마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은 이번 사고의 원인을 추진체 결함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의 미사일이 일종의 ‘썩은 사과’였다는 설명이다. 발사 10여 초만에 추진체의 노즐 구동장치가 작동 불능이 되면서 발사 방향(동해상)과 정반대로 비행하다 30초만에 추락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0월21일자 6면.
[단독]낙탄 현무, 발사 10초만에 방향전환 장치 불능… 반대로 날았다 (링크)


이번 사고는 비록 군과 윤석열 정부의 체면을 구겼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쓴 약이 될 수 도 있다. 실전이었다면 군의 대북 킬체인(kill chain)에 커다란 구멍이 나서 엄청난 희생을 초대했을만한 사고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국방과학연구소(ADD)와 제작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메워야 할 결함이 훈련 덕분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도 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화성-12형 발사 도발은 9월 말 미국의 니미츠급 핵추진항공모함 로널드레이건(CVN-76·약 10만 t)과 로스앤젤레스(LA)급 핵추진잠수함 아나폴리스(6000t)가 참가한 가운데 동해상에서 실시된 한미·한미일 연합훈련에 대한 고강도 도발로 한반도 유사시 미 전략자산의 발진기지가 ‘핵공격 타깃’이 될 것임을 노골적으로 위협한 것이다.

▶동아일보 10월11일자 6면.
김정은, 7차례 전술핵 훈련 모두 지휘… 北 “南 비행장-항구 타깃”(링크)


한미연합군사훈련 기간 동안 북한은 건건이 단거리 및 중거리탄도미사일 도발로 대응하고 전투기 남하나 동서해안 포사격 훈련도 곁들였다. 30일간의 잠행을 깨고 당 창건 77주년 기념일인 10일자 노동신문에 부인 이설주와 함께 등장한 김정은은 그간 북한의 대응도발이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지휘한 대남 전술핵부대 실전운용태세 점검 훈련이라는 점을 과시했다. 9월 25일부터 10월 9일까지 진행된 훈련에는 북한군 전술핵 운용부대, 장거리포병부대, 공군비행대가 참여했다. 한미연합훈련 기간 동안 그들도 기획 훈련으로 대응한 것이다.

대를 이어 대남 적화통일을 꿈꾸는 김씨 일가는 예외 없이 군사훈련을 강조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5년부터 베트남에 공군 등 병력 5000~1만 명(연인원)을 파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는 파병 여부를 결정하면서 “젊은 조종사들이 실제 전쟁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1994년 아버지 사망 이후 홀로서기를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군(先軍)정치’를 외치며 국가 위기상황의 전면에 군을 앞세웠다. 김정은은 다시 정상화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핑계로 한국의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 기간 동안 집중해 개발한 대남-대일 전술핵 공격능력을 실전처럼 운용해 본 셈이다.

군사훈련이 협상 칩인가? 클라우제비츠의 경고[신석호 기자의 우아한](링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전술핵운용부대 군사훈련을 참관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0월10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전술핵운용부대 군사훈련을 참관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0월10일 보도했다. 노동신문 = 뉴스1

왼손에 담배를 끼고 귀를 막은 채 부인 이설주와 함께 선 노동신문 홍보사진은 30일만에 자신의 건재를 대내외에 알리는 기획 사진이었을 것이다. 이를 포함한 89장의 사진은 이번 한미연합훈련에 동원된 핵항모 로널드레이건호나 스텔스 기능을 갖춘 F-35 등 한미의 최첨단 무기체계에 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까지 엿보이기도 한다. 훈련과정에서 북한은 여러 차례 2018년 9·19군사합의까지 위반했는데 이는, 남북간 군사대치 상황이 2017년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연합훈련의 정상화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한 미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도 사실상 파기된 셈이다.

저수지한가운데서까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쏴대는 은폐엄폐 능력에 비추면 한미연합군사전력의 대응 범위가 크게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측의 군사적 긴장강화는 북한에게도 큰 부담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겹겹이 제재에 둘러싸인 북한의 대외정책의 핵심은 한미군사훈련의 중단 또는 축소였다. 특히 1990년대 경제난 이후 달러와 원유가 부족해진 북한은 다양한 대남 대미 협상에서 연합훈련 축소 요구를 강하게 제기했다. 2018년 싱가포르 회담에서 한미군사훈련 축소, 평양회담에서 휴전선 일대의 한국군 훈련 중단 또는 축소를 약속받는 성과를 이뤘지만, 다시 원상회복의 수순이 되고 있다.

싸우지 않고 ‘북한 비핵화’를 이루고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든다는 게 한국과 미국, 국제사회의 변하지 않는 목표다. 하지만 이를 위한 협상과 군사적 대치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핵개발을 해온 북한이 이제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까지 핵으로 공격하는 능력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는 상황은 주변국의 대응태세가 과거와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맞대응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다.

서양의 클라우제비츠에 버금가는 군사 전략가이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던 중국 춘추시대 병가(兵家)인 손무는 손자병법 허실(虛實) 편에서 그 방편 하나를 이렇게 밝혔다. 싸우지 않고 이기려면 대치국면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혜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적이 편안하면 고단하게 하고 배부르면 굶주리게 만들며 안정되어 있으면 동요시켜야 한다.” -손자병법, 손무 지음, 박창희 해설, 플래닛미디어, 258-265쪽


정상화된 한미연합 군사훈련은 김정은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인도·태평양 지역을 관할하는 미국 해군 7함대의 칼 토머스 사령관도 “우리가 (동해) 지역에 있었던 것이 그(김정은)의 짜증(tantrum)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로널드레이건의 두 차례 한반도 해역 진출이 김정은의 핵공격 트라우마를 건드렸다는 설명이다.

▶동아일보 10월 17일자 6면.
美 7함대 사령관 “레이건항모 동해훈련에 김정은 짜증난듯”(링크)


고단하기만 한가.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데는 다량의 달러와 기름과 인력에 대한 병참비용이 들어간다. 김정은이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응해 훈련현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경제를 챙기기도, 정치를 단속하기도 어렵다. 그런 가운데 내부의 동요가 커질 수 있다.

적을 고단하게 굶주리게 동요하게 만들어 싸우지 않고 전쟁에서 이긴 대표적인 최고사령관은 1980년대 냉전을 통해 소련 제국을 무너뜨린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막대한 돈과 기술을 쏟아부은 ‘우주전쟁’을 주창해 소련을 끌고 다니며 고단하고 배고프고 동요하게 한 결과 소련은 안으로부터 무너졌다. 미국의 많은 항모중에 로널드레이건 호가 김정은을 짜증나게 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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