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1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표면적 이유는 대통령에게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것이다. 최근 대통령실과 갈등을 빚은 저출산 대책으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장인 윤 대통령에게 부담을 준 것에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 대표로 출마하려고 결단을 내린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尹, 안철수 초청한 두 가지 배경
나 전 부위원장은 지난해 10월 14일 임명될 때 이미 유력한 국민의힘 당권주자였다. 국민의힘 차기 당대표 적합도 조사에서 선전했고, 보수정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지지율 1위였다. 당시 “윤 대통령과 윤핵관(윤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이 나 전 의원의 전당대회 출마를 막으려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줬다”는 분석이 힘을 얻기도 했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은 나 전 부위원장을 정리한 뒤 유승민 전 의원에게 집중했다. 당시 유 전 의원이 국민의힘 차기 당대표 적합도 조사에서 대부분 1위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 전 의원을 꺾을 의도로 결행한 것이 바로 ‘당원투표 100%’ 전당대회 룰 개편이다. 나 전 부위원장에게 자리를 제공하고 2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 전 부위원장에게는 당근을 줬다면 유 전 의원에게는 채찍을 든 셈이다.
나 전 부위원장과 유 전 의원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와중에 윤 대통령은 친윤석열(친윤)계 당권주자인 국민의힘 김기현 전 원내대표를 두 차례나 관저로 초청했다. 지난해 11월 30일 관저에서 3시간가량 만찬하면서 독대를 했고, 12월 17일에는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부부 동반으로 관저로 초청해 만찬을 가졌다. 관련 사실이 알려지면서 윤심이 김 전 원내대표에게 있다는 설이 돌았고, 김 전 원내대표와 장제원 의원의 연합인 이른바 ‘김장연대’가 힘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김 전 원내대표의 당대표 적합도 여론조사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는 가운데 친윤 당권주자인 국민의힘 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1월 5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로써 국민의힘 차기 전당대회에서 친윤계 당대표를 만들기 위한 내부 교통정리가 거의 끝났다는 평가가 나왔다. 남은 사람은 안철수 의원뿐이다. 윤 대통령은 이번에도 직접 나섰다. 안 의원을 관저로 불러들이기로 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왜 안 의원을 관저로 초청했을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던 안 의원이다. 집권 초 총리설이 돌았지만 당에서 역할을 찾겠다며 고사하기도 했다. 총리보다는 차기 당대표가 본인의 대권 행보에 유리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 역시 안 의원에게는 나 전 부위원장처럼 자리를 주는 방식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안 의원이 나 전 부위원장의 지지층을 흡수해 경선에서 1등을 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만큼 보험을 들기로 했을 수도 있다. 안철수 대표 체제 하에서도 당에 영향력을 가지려는 포석이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이 큰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했을 무렵 나 전 부위원장이 돌변했다. 보수정당 지지층 대상 당대표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가 나오자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나 전 부위원장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점차 단호하게 당권 도전 의사를 밝히더니 출산 시 대출 원금을 일부 탕감해주자는 저출산 대책을 내걸고 나섰다. 대통령실은 해당 구상을 전면 부인했다.
일각에서는 나 전 부위원장이 단순히 아이디어 차원에서 꺼낸 카드에 대통령실이 의도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대로 나 전 부위원장이 도발을 유도해 사퇴 명분을 확보하려 했을 수도 있다. 다소 거친 방법이기는 하나 나 전 부위원장 입장에서 이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사퇴 구실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경원 당권 도전 가능성에 불편한 용산
나 전 부위원장이 끝내 당권에 도전하는 시나리오도 윤 대통령의 전당대회 로드맵에 있을까. 최악의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긴 했을 것이다. 마땅한 비상대책까지 마련해뒀는지는 의문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보다 더 고위직을 약속하면서 설득하는 방법, 개인적 약점을 찾아내 주저앉히는 방법, 배신자 프레임을 뒤집어씌워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방법 등이 언뜻 떠오른다.
나 전 부위원장은 사의를 표명한 당일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과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윤핵관인 이 의원이 윤 대통령을 대신해 물밑 협상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 전 부위원장은 만남 직후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거취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나 전 부위원장의 선택은 불명확하다. 하지만 차기 전당대회 경선에서 나 전 부위원장이 1위를 차지하고, 유 전 의원 또는 안 의원이 2위로 올라가 결선투표를 치를 가능성도 무시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의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무리해서라도 일단 친윤 당대표를 만들고 보자는 것이다. 문제는 무리를 하는 정도다. 한마디로 과하다. 군사정권 이후 어떤 정부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이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의 당무 개입 정도가 특히 그렇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친윤 지도부는 애써 외면하지만 윤 대통령의 당무 개입 증거는 적잖다. 첫째, 나 전 부위원장에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준 것이다. 둘째, 당원투표 100% 전당대회 룰 개정에 지지 발언을 한 것도 문제다. 셋째, 유력 당권주자들을 관저로 초청한 것 역시 당무 개입 소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실이 나서 나 전 부위원장에게 강한 압박을 가한 것도 마찬가지다. 자잘한 증거도 모아 봤을 때 일관성과 개연성이 나타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검사 출신인 윤 대통령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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