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측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 해법과 관련해 일본 경단련(經團連) 차원에서 한국 정부 산하 재단에 기부금을 낼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피고 기업들이 아닌 일반 일본 기업들이 모은 기부금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전달하면 재단이 한국 기업들이 기부한 돈과 함께 기금을 조성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변제하거나 피해자 및 유족 지원 사업 등에 쓰는 방식이다. 또 우리 정부가 재단을 통한 배상금 변제 해법을 발표하면 일본 정부가 즉각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 해제를 발표한 뒤, 시차를 두고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 선언’에서 명시된 사죄와 반성 의지를 밝히는 방향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18일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고위 관계자는 앞서 16일 한국 측 인사를 만나 “배상 판결의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의 직접 배상과 사죄는 불가하다”며 “한국 정부가 재단을 통한 배상금 변제안을 공식 발표하면 수출규제 조치의 즉각 해제는 가능하다”고 밝혔다. 또 “한일 관계 개선에 뜻을 둔 일본의 다른 기업들이 기금을 마련하고 경단련 차원에서 재단에 기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여권 관계자는 이번 주 한국을 방문한 일본 자민당 의원들이 “경단련을 통한 기부를 검토할 수 있지만 피고 기업들이 (이 기부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일 외교당국이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에 대한 협의를 이어가는 가운데 일본 정부의 구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건 처음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사과와 기여(정부 산하 재단을 통해 피해자에게 기부) 측면에서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있어야 한국 정부가 독자적 해법을 발표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사실상 해법의 공을 일본에 넘긴 셈이다. 일본의 구상까지 드러난 만큼 강제징용 문제 협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 “日 전범기업 기부 가능성은 열어 놓아”
18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일본 정부의 구상은 이렇다. 우선 한국 정부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변제하는 안을 발표하면 일본 경단련이 환영 의사를 표시한다. 이어 일본 정부는 2019년 7월 시행한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생산에 필수적인 3개 품목에 대한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해제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또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토대로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의지’도 전한다. 이후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 책임이 있는 전범 기업들(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이 아닌 일본의 다른 기업들(한국에 지사를 둔 대기업 등)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목적으로 기금을 모아 경단련을 통해 재단에 기부한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은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직접 사죄하거나 판결에 따라 배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전범기업이 직접 배상하는 것이 어렵다면 재단이 조성한 기금을 변제하는 데는 기부금을 내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자발적인 기업의 의사가 존중돼야 한다”면서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의 기부를 강요할 순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외교 소식통은 “피해자들에 대한 재단의 배상금 변제가 잘 진행되면 상황을 보면서 두 기업이 경단련을 통해 재단에 기부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의 검토와 별개로 두 기업이 기부하지 않겠다고 할 가능성도 있다”고도 말했다.
일본은 수출규제 조치 해제를 중요한 ‘호응 조치’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16일 외무성 고위 관계자는 한일 국장급 협의 후 한국 측 인사를 만나 수출 규제 해제는 ‘한국 정부의 해법과 등가 교환이 아니다’라는 지적에 “(다른 방식을 찾을 경우) 해결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 주 방한한 일본 의원들 또한 “(한국) 정부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해법을 발표할 순 없다”며 “수출규제 조치 해제로는 안 되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 日 “韓이 구상권 청구 포기해야 진전 가능”
일본 NHK방송은 18일 “일본 정부는 재단이 원고(피해자)에게 (배상금) 지급을 끝낸 뒤 일본 기업에 변제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담보가 불가결하다고 보고, 한국 정부의 작업(강제징용 해결책)을 주시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에 ‘구상권 미(未)청구’를 약속해야 어떤 식으로든 일본 기업의 참여가 진행될 수 있다는 입장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간부는 한일 협의가 “막판이라는 것은 틀림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는 이날 일본 마이니치신문 인터뷰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는 일본 기업과 직접 만나 사죄받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강요할 것은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일본 기업이 자금을 모아 내는 것도 화해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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