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부진 ‘K칩스법’과 新 애치슨 라인[한상준의 정치 인사이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24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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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20일 한국에 도착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곧바로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다. 취임 이후 최초로 아시아 방문길에 나선 바이든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의 첫 방문지로 한국의 반도체 현장을 택한 것.

그로부터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해 8월 초, 낸시 팰로시 미 하원의장은 전격적으로 대만을 방문했다.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미국 국가서열 3위인 팰로시 의장은 대만 방문 이틀째 날, 대만의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TSMC의 전·현직 회장을 만났다.

미국 최고위층의 해외 방문은 철저한 계산 속에 이뤄진다. 바이든 대통령과 팰로시 의장의 아시아 방문이 겨냥한 것은 중국. 그리고 두 사람의 행보에 담긴 공통된 키워드는 반도체였다.

1950년 1월 미국은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한다. 소련과 중국에 맞서 미국이 정한 극동(極東)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은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선이다. 당시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 바깥에 있었다.

그로부터 73년이 지난 지금, 미국 서열 1위와 3위의 아시아 방문이 끝난 뒤 경제계와 외교가에서는 ‘신(新) 애치슨 라인’이라는 말이 회자 된다. 반도체 전문가인 김정호 KAIST 교수가 ‘반도체 애치슨 라인’이라고 부르기도 한 이 라인은 한반도의 경기 이천과 평택, 대만 타이베이 등을 품는 새로운 선이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이 고려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방어선이다. 이천과 평택에는 각각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있고, 대만 타이베이 북부의 신주과학단지는 TSMC의 무대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갈등은 전 세계에 반도체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 당시 일본이 택한 3개의 수출 규제 품목은 명백히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노린 공세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석유보다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 반도체는 이제 경제, 산업을 뛰어넘어 외교안보의 핵심이 된 것.

2018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반도체 칩은 사람의 심장과도 같다”며 ‘반도체 굴기(崛起)’를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의 집중적인 견제 등으로 인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고전하고 있다.

결국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가 꾸준히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는 양안(兩岸) 통일 시 대만의 TSMC를 중국의 영향력 안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만은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지켜주는 건 미국의 무기가 아니라 반도체 공장들”이라고 할 정도다. 반도체가 만들어낸 ‘신 애치슨 라인’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믿고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1위다. TSMC는 시스템반도체 시장의 선두 주자다.

문제는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수많은 계산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반도체의 중요성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가 ‘2030년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를 목표로 내건 이유다. 날로 커지는 시스템반도체 시장으로 인해 분기별 매출에서 TSMC는 지난해 3분기부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을 앞질렀다.

게다가 반도체를 ‘호국신기(護國神器·나라를 지키는 신의 무기)’로 부르는 대만은 TSMC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한층 더 강화했다. 우리의 국회 격인 대만 입법원은 7일 반도체, 5세대(5G) 이동통신 등 첨단 산업 기업에 대해 연구개발(R&D) 비용의 세액공제율을 15%에서 25%로 높이고 새 장비 구매 투자도 5%의 세액공제를 추가하는 ‘대만판 반도체법’을 처리했다. 발의 두 달여 만이다.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대만반도체제조공사)’라는 TSMC의 정식 명칭이 말해주듯 대만 정부와 TSMC는 사실상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

그렇다면 우리 정부와 국회는 어떤가.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6월 국무회의에서 “반도체는 국가 안보의 자산이자 우리 산업의 핵심”이라며 전폭적인 지원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국내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이른바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이 마련됐다.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 확대 등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조특법) 개정안이 핵심이다.

공을 넘겨 받은 국민의힘 반도체특별위원회는 세액공제를 20%(대기업 기준)까지 높이는 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3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에 담긴 세액공제율은 8%. 세수(稅收) 위축을 우려한 기획재정부의 축소안을 국민의힘도, 더불어민주당도 별 고민 없이 수용해버린 것. 지금 시점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이라도 투자, 생산 전략에서 조금만 삐끗하면 경쟁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는 반도체 시장의 현실을 모르고 있고, 알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은 원가에서 설비 투자가 차지하는 비용이 압도적으로 높다. 게다가 단 1년여의 기술 격차는 원가의 20~30% 차이로 이어진다. 이런 반도체 산업의 특성에 대해 반도체 전문가인 정인성 박사는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최고의 성능과 가장 싼 원가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 있는 기업이 막대한 영업이익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서 후발 주자와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는 것.

이런 투자에 세제 혜택을 주자는 ‘K칩스법’을 두고 야당 일각에서는 “대기업 특혜법”이라는 반발도 나온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국내 기업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증착 장비 제조, 세정 설비, 검사 등의 반도체 공정의 전 분야에서 수많은 우리 중소·중견기업이 뛰고 있다는 걸 이들은 모르고 있다.

반도체 인력 양성 역시 마찬가지다. 만성적인 반도체 인력난 해소를 위해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학과 정원을 확대하자는 제안은 “수도권 집중을 부추겨 국토균형발전을 저해한다”는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좌초됐다. 사막이 펼쳐진 미국 애리조나에 TSMC와 인텔이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건 애리조나주립대, 애리조나대, 노던 애리조나주립대 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

말 그대로 시늉만 낸 ‘K칩스법’이 통과되자, 윤 대통령은 “반도체 등 국가전략산업에 대한 세제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제서야 기재부는 부랴부랴 세액공제율을 최대 25%까지 높인 조특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조특법 개정안이 언제 국회를 통과할지 미지수다. 여야 모두 다급한 기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2월 기재부가 개정안을 낸다 해도 국회에서 어떤 논의가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기술이 산업 분야를 뛰어넘어 국가의 안보를 좌우하는 ‘기술 안보’의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는 걸, 국회만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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