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 이른바 건군절 기념 열병식을 보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관심은 온통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네 발과 주석단에 오른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 모아졌습니다. 김주애가 김정은의 후계자인지를 둘러싼 섣부르고 소모적인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북한이 3대 세습을 넘어 4대 세습을 위한 정지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신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중요 기념일의 5,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정주년)마다 열리는 제대로된 열병식 주석단에 북한 김씨 독재자가 자식을 데리고 등장하는 장면 자체가 흔하지 않습니다. 생전 김정일이 김정은을 데리고 등장했던 2010년 10월 10일, 65주년 당창건기념일의 열병식 장면이 생생합니다. 마침 김일성의 지시로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87세 일기로 서울에서 사망했던 날이었습니다. 처음 무대에 올린 아들을 바라보는 걱정스런 김정일의 눈빛과 잔뜩 긴장한 26세 김정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아래는 황 전 비서의 사망 소식과 함께 다음날 동아일보 1면에 실렸던 사진입니다.
23년 뒤인 8일 김정은은 딸 김주애를 데리고 주석단에 올랐습니다. 김주애는 부인 이설주보다 더 대접받는 모양새였습니다. 당연하지요. 이설주는 이씨이고 김주애는 김씨 이기 때문입니다. 10대 김주애가 후계가 될지 아닐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가 김일성의 증손녀, 이른바 ‘백두혈통’의 4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그를 주석단에 올려놓고 그날 열병식장에 벌어진 일은 모두 북한의 4대 세습 분위기 띄우기에 집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올해 4월 김일성의 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전후해 인공위성을 띄우겠다고 공언한 북한은 이를 핑계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의 정상각도 발사를 단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과 일본, 미국에 핵으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4대 세습을 할 수 있다. 고로 김씨 독재 정권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들 마라. 지금처럼 충성해라!.’ 이게 8일 열병식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런데요, 그런 뻔한 스토리에 흥미로운 소품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활동을 같이한 이른바 ‘빨치산’들의 영정이 4대 세습 분위기 띄우기에 무더기로 동원되었다는 겁니다. 북한군이 죽은 선배들의 얼굴 사진을 들고 행진을 했다는 것인데, 제 눈에는 죽은 선배들을 영정사진의 형식으로 등장시켜 3대세습 후계자 김정은과 4대 김주애에게 사열을 시킨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오늘 가라사대의 제목입니다.
구체적으로 조선중앙통신은 세 문단에 걸쳐서 빨치산 출신 ‘북한 개국 공신’ 8명과 이후 군 간부 등 모두 18명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오늘 소개할 8명은 첫 문단에 소개된 빨치산 출신 ‘북한 개국 공신’ 8명입니다. 통신이 공개한 순서대로 김책 안길 최용건 오중흡 김일 김주현 오백룡 강건이 바로 그들입니다.
북한을 20년 넘게 공부하고 지켜보고 있지만 대충 이름만 들었던 그들의 프로파일을 확인하기 위해 책들을 뒤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북한 조선인민군의 창설 역사가 꿰어졌습니다. 8일 북한이 기념한 건군절은 김일성이 1948년 2월 8일 당시까지 비밀리에 키워온 정규군을 ‘조선인민군’으로 명명하여 공식적으로 군창설식을 가졌다는 이벤트입니다. 8일 소개된 8명 가운데 당시까지 살아남았던 5명은 요직을 맡게 됩니다. 최용건은 사령관을, 강건은 총참모장이 됩니다. 이후 5명은 죽을 때까지 김일성과 김정은의 ‘은전’을 받아 요직을 독차지했고 대대손손 북한의 핵심성분 지위를 누립니다. 김주현과 오중흡 역시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1937년 6월 이른바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지만 해방 전인 1938년과 1939년 전사했습니다. 안길은 북한 정권 수립 직전인 1947년 12월 사망합니다.
김일성을 둘러싼 8명의 관계는 훨씬 더 이전에 시작됩니다. 말씀드린대로 8명은 100%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활동을 같이 한 빨치산 출신입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저서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에서 북한 건설과정에 참여한 빨치산을 100여 명으로 계산했는데 8명은 초기인 1932~35년 사이에 참가했던 인물입니다.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은 6명은 일본을 막기 위해 동아시아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원과 비호를 받아 ‘제대로 된’ 군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최용건 김책 안길 강건 등 4명은 아래 과정을 통해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대위 출신이지요.
“소련군들은 빨치산 출신 중 교육 정도가 비교적 높거나 만주시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선별하여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보병학교에서 6개월 동안 장교 속성교육을 시키고 정규군의 초보전술을 가르쳤다. 소련군은 유격대 경력, 장교교육에서 성적 등을 고려해 88여단 내에서 이들에게 계급과 직책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김광수, “조선인민군의 창설과 발전, 1945~1990”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엮음,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 한울아카데미, 2006, 82쪽.)
최용건 김책은 해방 이후인 1945년 7월 김일성이 ‘조선에서의 당 건설과 해방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조선공작단’을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오려 했지만 소련군의 반대로 해방 이후 가명을 사용해 개인 자격으로 북한에 들어옵니다. 소련군 정찰대에 파견되었던 오백룡 만이 유일하게 소련군과 함께 북한 지역에 진주했습니다. 1946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난 김일성은 정규군을 만들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와 ‘보안간부학교’라는 이름의 군관학교를 설립합니다. 당연히 빨치산 측근들을 요직에 중용하죠.
“김일성은 간부 구성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사령관에는 88여단의 부참모장이었던 최용건이 임명되고 참모장으로는 같은 여단 제1대대의 정치위원을 지낸 안길이 임명되었다. 계몽과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책인 문화사령관에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김일이 임명되었다.”(김광수, “조선인민군의 창설과 발전, 1945~1990”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엮음,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 한울아카데미, 2006, 72~73쪽.)
최용건은 북한 건국 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을 1인 독재자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2인자로 군림하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부주석 등을 지내고 1976년 사망합니다. 김일도 내각 부수상, 정무원 총리, 국가부주석 등 권력서열 3위를 지키다 1984년 사망했습니다. 오백룡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정위원 등을 거쳐 1984년 사망했습니다.
6.25전쟁 중에 죽은 이는 둘입니다. 김책은 초대 내각부수상 겸 산업상을 맡았는데 6.25전쟁 중인 1951년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강건도 초대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1950년 6.25전쟁을 일으켰다가 그해 9월 전사합니다.
설마 이들이 숨을 거두면서 영정의 형태로 김씨 4대 세습에 활용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못했을 겁니다. 다만 김씨 일가가 영원히 권력을 지켜 자자손손 대를 이어 호가호위를 하기는 바랬을 겁니다. ‘김책공대’로 북한 역사에 영원이 이름을 새긴 김책의 아들은 노동당 간부담당 비서를 오래 지낸 김국태 였습니다. 한번 김씨 일가의 ‘로열패밀리’가 되면 대대손손 잘 먹고 사는 나라, 로열패밀리의 2대, 3대가 물려받은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김씨 2대, 3대 후계자에게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쳐 무너지지 않는 나라, 그게 오늘의 북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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