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기금을 모아 대신 변제하는 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 박창환 씨의 아들인 박재훈 씨(77)는 1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혜택 기업인 포스코 등 한국 기업이 재단이 마련하는 기금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배상해도 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고인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한 ‘히로시마 강제징용 사건’ 피해자 5명 중 1명이다.
‘히로시마 강제징용 사건’ 피해자인 고 이병목 씨의 아들 이규매 씨(74)도 2일 인터뷰에서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이 직접 사죄하고 배상해주면 좋을 것”이라면서도 “(피고 기업이) 끝까지 배상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청구권 협정으로 혜택을 입은 (한국) 기업들이라도 피해자와 유족 복지 차원에서 돈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만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시민모임)은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들은) 동냥하듯 아무한테나 명분 없는 돈을 구걸해 받을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시민모임은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 이춘식 할아버지 등 강제징용 피해자 일부를 지원하는 단체다. 이춘식 할아버지는 이날 광주 자택을 찾은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과 심규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에게 “일본의 책임 있는 사과를 강조했다”고 소송 대리인 임재성 변호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 사이에서 배상 해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해결 상태,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동아일보는 서울과 경기 수원, 평택 등에 거주하는 유족 4명을 직접 찾거나 전화로 인터뷰했다. 박재훈, 이규매, 김인석 씨(69)와 익명을 요구한 A 씨다.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11일까지 동아일보는 2018년 10월과 11월 각각 대법원에서 일본 피고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강제징용 3건의 원고(피해자) 14명 가운데 7명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4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일본 가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 대법원 승소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미쓰비시중공업의 히로시마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피해자 5명, 미쓰비시 나고야 공장에서 근로했던 피해자 5명, 일본제철에서 노역을 했던 피해자 4명이다.
인터뷰에 응한 김인석 씨는 일본제철에서 노역을 했던 고 김규수 씨의 아들이고, A 씨는 나고야 공장에서 노역한 할머니의 유족이다. 정부가 일본과 강제징용 배상 협의에 속도를 내면서 해법 최종 발표를 앞두고 면담을 하기로 한 가운데 확정 판결 피해자 유족들의 입장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박재훈 씨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배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뤄져야 한다”며 “강제징용 문제가 (미해결된 채) 우리 같은 피해자 자녀인 2세들을 넘어 3세 손자녀대까지 이어지길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규매 씨는 “기다린 세월이 너무 길어서 때로는 소송을 제기한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A 씨도 “직접 배상을 받든 다른 식이든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고 기업의 배상금 지급 방식에 대해 이규매 씨는 “배상에 대한 의견이 다른 피해자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배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꼭 (거론되는 한국과 일본) 기업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인석 씨는 “일본 정부든 한국 정부든 얼마나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피해자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일단 금전적인 보상이라도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돈을 내주지 않는다면, 사고가 났을 때 보험회사가 먼저 처리하듯 우리 정부에서 (배상금을) 선(先)지급하고, 일본에 요구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피고 기업 사죄 어려우면 日 정부가 사과해야”
동아일보 인터뷰에 응한 유족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본 피고 기업들의 사죄가 바람직하고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이규매 씨는 “미쓰비시중공업이 직접 사과를 하면 제일 좋지만 사죄를 안 해도, 누가 해도 상관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죄보단 배상 문제가 빨리 해결돼야 한일 양국 간 속 시끄러운 문제가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박재훈 씨는 “일본이 강제로 한국인들을 끌고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잘못했다는 내용이 담긴 공개적인 사과가 필요하다”면서도 “(기업의 사죄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일본 당국이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인석 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말씀하셨던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가 솟구쳐 오르고 잘못한 게 없다는 기업 측 입장들이 괘씸하다”면서도 “이미 지나간 과거인 만큼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시민모임 “피고 기업이 사죄, 배상해야”
시민모임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외교부가 피해자에게 면담을 제안한 것과 관련해 “최종 발표에 앞서 절차적 명분을 갖추기 위한 마지막 요식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가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양금덕 할머니는 지난해 9월 박진 외교부 장관을 만나 “돈 때문이라면 진즉 포기했다”면서 “일본에 사죄받기 전에는 죽어도 못 하겠다”고 적힌 손편지를 건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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