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국회서 발묶인 법안 1만3198건… ‘일하는 국회법’ 시행후 되레 3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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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안하는 국회]
여야 정쟁속 상임위 계류법안 급증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용산 이태원 핼러윈 참사 직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선 재발 방지를 위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이 줄지어 발의됐다. 개정안에는 이태원 참사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특정 지역에 많은 사람이 밀집할 경우 이동통신사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활용해 긴급재난문자를 선제적으로 발송하는 등의 방지책이 담겼다.

하지만 지난해 말 행안위 법안심사소위원회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 등을 둘러싼 여야 갈등 속에 공전만 거듭했다. 개정안은 이달 21일에야 법안소위의 첫 문턱을 넘었다. 참사가 발생한 지 4개월 만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행안위 관계자는 “참사 직후 국정조사와 이 장관 해임 및 탄핵을 두고 여야가 워낙 격하게 대립했다. 소위 일정을 잡는 것도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토로했다.

국회가 2021년부터 입법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일하는 국회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국회 상임위마다 여야 간 정쟁이 장기화되면서 각 상임위에 발이 묶인 법안들이 매년 빠르게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동아일보가 민주당 김수흥 의원실로부터 입수한 국회 사무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17개 상임위에 계류된 법안은 1만3198건(상임위당 평균 776.4건)으로 2021년 8957건(평균 526.9건) 대비 약 1.5배로 늘었다. ‘일하는 국회법’ 시행 전인 2020년 말 4023건(평균 236.6건)에 비해 되레 3배 이상으로 늘어난 수치다. 상임위별로는 국민 안전과 건강 이슈를 다루는 행안위(1844건)와 보건복지위원회(1541건)의 계류 법안이 가장 많았다.

국회의원들이 ‘선심성’ 법안 발의를 남발하는 것도 계류 법안이 누적되는 원인으로 꼽힌다. 전학선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생 관련 선심성 법안 발의가 가능한 상임위일수록 계류 법안 수가 많다”며 “법안이 남발하면서 오히려 국회의 가장 본질적인 입법 기능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1년 3월 ‘일하는 국회법’이 시행됐지만 여전히 “일을 하지 않는 국회”라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법은 법률안을 심사하는 소위원회의 경우 매월 3회 이상 개회하도록 했지만, 17개 상임위의 법안소위 평균 개회 수는 2021년 월 1.3회, 2022년 0.6회에 그쳤다. ‘일하는 국회법’이 규정한 ‘월 3회 이상 법안소위 개최’를 지킨 상임위는 한 곳도 없었다.

계류 법안, 국민 안전-건강 다루는 행안위 1844건-복지위 1541건


일하는 국회법 이후 3배
상임위당 평균 776건 법안 계류
21대국회 법안처리율 26% 최저
의원들 선심성 법안 남발도 원인


2021년 초 쌍둥이 여자 배구 선수 이재영, 이다영 자매의 ‘학교폭력’ 가해 논란 등 ‘학폭’ 의혹이 우후죽순으로 터졌다. 심상치 않은 ‘학폭 근절’ 여론에 국회도 나섰다. 2021년 이후 여야 할 것 없이 줄줄이 발의한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개정안만 28건. 하지만 이제 막 국회 교육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가 시작돼 28건 모두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한 상태다. 교육위 소속 한 의원은 “학교폭력, 학교 성폭력 관련 등 시급한 법안 처리를 위해 위원장이 소위 횟수를 늘려 달라고 독촉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 후반기 원(院) 구성부터 여야 대립
지난해 5월 정권교체 이후 거대 야당과 소수 여당이 21대 국회 후반기 원(院) 구성 협상부터 대립하면서 국회 마비가 예고됐다. 상임위마다 여야가 정치 공방에 치중하면서 민생 법안 처리가 뒤로 밀렸다.

환경노동위원회의 경우 여야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도 단 한 차례도 논의하지 못했다. 국민의힘 박대수 의원과 민주당 이수진 의원(비례)은 파견사업주가 중간에서 임금을 가로채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규제 법안을 각각 발의했지만 최근 4차례의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원회가 모두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 3조 개정안)에 발목이 묶이면서 해당 법안이 논의 안건에 오르지 못했다.

이처럼 정쟁으로 민생 법안 처리에 뒷전인 국회의 단면은 상임위별 소위 개최 횟수에서도 드러난다. 민주당 장철민 의원실에 따르면 국회 운영위원회는 지난해 단 한 번도 소위를 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등을 소관기관으로 두고 있는 운영위에선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이전 문제 등을 시작으로 여야 간 갈등이 이어져 왔다. 외교통일위원회 역시 지난해 소위가 단 2차례 열리는 데 그쳤다. 윤 대통령의 순방 ‘비속어 논란’ 등의 여파로 풀이된다. 장 의원은 소위가 월 3회 이상 열리지 않을 경우 해당 상임위원들의 수당과 특별활동비 등을 절반으로 감액하는 법안을 22일 발의했다.

민주당 김영배 의원은 “원 구성 때부터 정쟁적 요소를 고려하니 일하는 상임위가 되지 못하고 입법 활동이 멈췄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은 “서로 싸우면서도 타협하는 문화가 사라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소속 민형배 의원은 “여야 갈등이 극대화하면서 상임위에서의 법안 개정과 제정이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 지역 공약 등 선심성 법안 남발
상임위별 계류법안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은 의원들이 ‘선심성 법안’을 남발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논의할 시간이나 기회는 상대적으로 줄어든 반면 법안 개수만 늘어났다는 지적이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7대 국회에서는 총 7489건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18대 국회 1만3913건, 19대 국회 1만7822건, 20대 국회 2만4141건으로 매년 발의 법안 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반대로 법안 처리 비율은 △17대 50.3% △18대 44.4% △19대 41.7% △20대 36.4%로 떨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21대 국회 법안 처리율은 26.2%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한 의원실 보좌관은 “의원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이슈성’ 법안을 던진다든지, 자신의 지역구만을 의식해 선심성 지역 공약 법안을 발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특히 법안을 던지면 관련 이익단체에서 ‘법안을 잘 처리해 달라’고 후원금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홍완식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에서 내는 발의안은 규제 심사가 있지만 의원입법은 규제 절차가 전혀 없다”며 “비슷한 법안들이 계속해서 발의되니 옥석 구분이 어려워 매 국회마다 1만 건 이상의 법안이 폐기된다”고 지적했다.

일하는 국회법
입법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년 중 10개월 동안 국회를 열고 국회 상임위원회 개최 횟수를 늘리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으로 2021년 3월부터 적용됐다. 상임위 전체회의는 매월 2번 이상, 법안을 다루는 심사소위원회는 매월 3번 이상 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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