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졌던 의문입니다. 닫힌 섬과 같은 여의도만 보고선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시야를 넓혀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고 한국 정치와 신랄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때로는 우리 정치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일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젠간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K정치도 호평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13일 일본 도쿄에 있는 총리관저 앞. 몇 달 전까지 우리에게도 낯익었던 광경이 하나 펼쳐졌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관저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기자들과 질문을 주고받는 즉석 회견이 진행된 것입니다.
이날은 정부가 시민들의 마스크 착용을 자율화한 첫날이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총리 취임 후 처음으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기자들 앞에 섰습니다. 그와 동행한 비서관들과 경호원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기자들에게 “마스크 착용은 개인 판단에 맡기는 등 착용 여부를 강제하지 않는다. 나도 마스크를 벗는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언행은 자연스럽게 정부의 마스크 착용 지침을 홍보하는 효과를 거뒀습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총리가 출입기자들과 서서 질의응답을 하는 취재 관행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매달리기라는 뜻의 ‘부라사가리(ぶら下がり)’라는 은어로 불립니다. 기시다 총리는 취임 후 부라사가리를 1년간 172회 진행할 정도로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 적극적입니다. 부라사가리는 ‘듣는 힘’을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기시다 총리 시대의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 3월부터 총리실 관저 문 앞에서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두툼한 노트를 들고나온 총리가 코로나 관련 주요 현안에 관해 설명하고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캐나다 언론에 따르면 그는 도어스테핑에서 평균 16개의 질문에 답을 했다고 합니다.
트뤼도 총리의 도어스테핑은 코로나 극복 과정의 중요한 상징이 됐습니다. 국민의 60% 이상이 도어스테핑 방식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도 있었습니다. 트뤼도 총리는 이를 바탕으로 2021년 9월 세 번째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트뤼도 총리는 최근 중국이 캐나다 집권여당 자유당 후보들을 지원했다는 선거 개입 의혹이 제기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정례 기자회견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 “중요한 사항은 직접 브리핑”…사라진 文의 약속
오래된 기억을 꺼내 봅니다.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한 문재인 대통령은 첫 주말이었던 그해 5월 13일 자신의 마크맨(전담 취재기자)을 청와대로 불러 북악산 등산을 함께 했습니다. 대선 기간 문 대통령을 취재한 필자를 비롯한 60여 명의 기자들이 산행에 나섰습니다.
당선 직후여서 그런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자들도 문 대통령을 지지했든 아니든 새 정부를 응원하는 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북악산에 올랐던 추억을 되새기면서 등산로 하나하나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고 모처럼 경계심을 풀고 편하게 기자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소수의 참모와 경호원 1명만 대동한 채 산행에 나섰습니다. 기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고, 경호가 이렇게 허술해도 되나 싶은 정도로 대통령과 편안한 소통이 이뤄졌습니다. 필자가 내리막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뎌 문 대통령의 발뒤꿈치를 살짝 차기도 했는데, 대통령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등산 과정에서 종종 바위에 걸터앉아 기자들과 즉석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언론과의 관계에 대해 “대변인에게만 맡기지 않고 중요한 사항은 직접 브리핑하기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기자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대선 기간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선언했던 그가 대언론 소통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습니다.
물론 다들 잘 아시다시피 그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취임 초에는 청와대 출입기자단 기자실인 춘추관을 깜짝 방문하기도 했던 문 대통령은 인사, 정책 등에서 논란이 이어지면서 서서히 기자들과의 접촉을 줄였습니다. 그나마 있던 신년 기자회견도 취임 마지막 해에는 코로나19를 이유로 열지 않았습니다.
기자협회보 통계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이 재임 기간 직접 브리핑과 기자간담회에 나섰던 횟수는 문 대통령이 6회로, 임기 내내 불통 비판을 받았던 박근혜 대통령(5회)과 비슷했습니다. 김대중(150회), 노무현(150회), 이명박(20회) 전 대통령에 비해서도 현저히 적은 수치였죠.
● ‘빛바랜’ 尹의 즉문즉답 의지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다소 편향된 언론관으로 우려를 자아낸 바 있습니다. 자신을 비판하거나 의혹을 제기하는 매체를 ‘친여 매체’로 지칭했습니다. ‘친여 매체’로 규정한 언론사와는 인터뷰하지 않았습니다. 개표 방송 영상 촬영에도 응하지 않아 많은 방송 관계자와 대선캠프 공보팀을 애타게 했습니다.
개별 언론사에 대한 호불호는 있지만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대국민 소통에 나서겠다는 의지는 분명했습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일 때부터 도어스테핑에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현장 기자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로 출근하는 윤 당선자에게 수시로 “당선자님 오늘 한 말씀만 해주세요”라고 요청했고, 당선자는 대부분 호응했습니다.
자신이 답하기 싫은 질문은 잘 대답하지 않는 모습도 있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질문과 답변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당선 후 첫 기자회견 때는 “기자 여러분들과 간담회를 자주 갖겠다”며 “언론 앞에 자주 서겠다. 좋은 질문을 많이 제게 던져달라”고도 했습니다. 취임 후 기자들에게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준다는 훈훈한(?) 약속도 오가는 등 그의 소통 의지는 주목할만했습니다.
윤 대통령 취임 후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하면서 기자실을 같은 건물에 만들고 도어스테핑을 꾸준히 진행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도어스테핑은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까지 했습니다.
참모들의 설명에 따르면 평생을 검사로 일했던 윤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적 기반에 약한 만큼 자신의 발언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질책을 두려워한 일부 고위 관료들은 “제발 도어스테핑 때 우리 부서 현안을 묻지 말아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하는 상황까지 벌어질 정도로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참모진이 준 답변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본인의 언어로 직접 설명하는 윤 당선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부 말실수가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도어스테핑은 용산 시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MBC 기자와 대통령실 비서관과의 충돌 이후 잠정 중단됐고, 지난해 11월 총 61회를 끝으로 신선한 정치 실험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 미국 대통령이 휴가지에서도 기자들과 만나는 이유
사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각국 정상이 기자들과 수시로 만나 즉문즉답을 나누는 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적인 언론을 적대시하고 악마화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했던 미국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도 취임 후에는 집권 기간 내내 언론과 불편한 관계로 지냈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반대파 신문이 자유를 남용한다면서 이들을 기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문을 감쌌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미국 대통령 프로젝트(The American Presidency Project)’ 집계를 보면 1920~30년대에 비해 최근 20년간 미국 대통령들의 기자회견 빈도는 약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오죽하면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원하지 않는 이유에 관한 연구도 진행됐습니다.
이에 따르면 △기자들이 대통령이 질문을 회피한다고 비난할 수 있고 △기자들의 논쟁적 질문에 대해 정치적으로 유리한 대답이 없으며 △대통령의 발언이 정파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대중이 대통령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그를 싫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미국 대통령은 공식 기자회견뿐만 아니라 수시로 기자회견을 합니다. 헬기를 타러 가다가도 기자들과 마주쳐서 질문을 받고, 휴가지에서도 필요하면 그곳에 있는 기자들과 회견하죠. 왜일까요? 정치적 필요성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언론을 통한 국민과의 소통이 대통령의 중요한 업무이자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까닭일 것입니다.
1920년대 미국 30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말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도 한마디도 안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재임 기간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많은 407회에 걸쳐 직접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자회견을 많이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이 하려는 일에 대해 국민에게 정확한 보고를 하는 것이 우리 공화국의 제도를 계승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검사 출신의 정치 신인인 윤석열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여의도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그에게 ‘원칙과 상식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를 해달라’는 기대를 담았습니다.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시도였습니다. 그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다시금 언론과의 소통의 장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윤 대통령이 대선을 한 달 앞둔 지난해 2월 11일 2차 대선 후보 TV토론에 나와서 했던 말을 남깁니다.
“대통령은 언론에 자주 나와서 기자들로부터 귀찮지만 자주 질문을 받아야 하고 솔직하게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에 취임하면 아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 1회 정도씩은 기자들과 기탄없이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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