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정당 현수막 거리공해에 전국이 몸살
작년 12월부터 정당현수막 자유화… 정당활동 자유 위해 필요하다더니
상대 당 비난과 조롱 무차별 게시… 현수막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까지
커지는 민원에 지자체도 목소리… 국회, 시행 3개월 만에 법 개정 검토
#1 21일, 4·3사건 희생자 추념식을 2주가량 앞둔 제주도 내 주요 거리 80곳에 ‘4·3은 김일성의 공산 폭동’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일제히 내걸렸다. 일부 보수 정당들이 연합해 기습적으로 설치한 것. 도민들의 항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법적으로 정당은 자유롭게 현수막을 걸 수 있도록 돼 있어 함부로 철거할 수 없는 상황이다.
#2 1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초등학교 담벼락에는 ‘이재명판 더글로리 죄지었으면 벌받아야지’라는 문구의 국민의힘 정당 현수막이 붙었다. 같은 날 경기 용인시 수지구의 한 초등학교 앞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정순신 학폭, 곽상도 50억’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이경진 씨(44)는 “등굣길에 현수막을 본 아들이 ‘왜 맨날 서로 욕하는 내용이 걸려 있느냐’고 묻는다. 왜 이런 현수막을 학교 앞에 붙이는지도 이해가 안 가고, 정당들이 왜 서로 정치 혐오를 만들지 못해 안달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3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부산 동구 KTX 부산역 앞에 각각 서로를 겨냥해 ‘윤석열 정권 치욕적 대일 굴종 협상’, ‘범죄 혐의자 방탄 민주당은 각성하라’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하지만 다음 달 4∼7일 2030 부산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분수령이 될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 방문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역사회에서 즉각 논란이 일었다. 자칫 실사단이 역 주변과 시내 곳곳에 붙은 정치 현수막을 자신들을 환영하는 현수막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결국 양당은 BIE 실사가 끝날 때까지만 정치 현수막을 떼기로 합의했다. 국민의힘 부산시당 관계자는 “외국인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여야 합심해 셀프 현수막 규제 풀어
옥외광고물관리법의 개정으로 지난해 12월 11일부터 정당 현수막은 보름을 기한으로 언제 어디서든 설치할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전국이 정당들이 내건 현수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야가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앞세워 스스로 현수막 규제 빗장을 풀어 버리고는 마구잡이로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는 것.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여야의 낯 뜨거운 상호 비방 문구가 사회 공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정당 현수막의 규제를 풀자는 주장은 2020년 7월부터 시작됐다. 민주당 김민철 의원이 정당 현수막 규제를 풀 옥외광고물관리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 이후 같은 당 서영교 김남국 의원도 비슷한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전까지 정당 현수막은 일반 상업광고와 마찬가지로 관할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거쳐 지정된 현수막 게시대에만 걸 수 있었다. 이를 어기면 불법으로 보고 지자체장이 철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원들은 개정안을 통해 이 같은 규제가 헌법이 보장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위축시킨다고 주장하며, 특히 지자체장이 어느 당 소속인지에 따라 현수막 철거가 제멋대로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정당 정책은 ‘홍보 적시성’이 중요하다고도 주장했다.
이후 국회 논의 과정은 2021년 11월 2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당시 개정안에 대해 행안위 수석전문위원은 “일반 사업자와의 형평성, 정당 홍보물의 난립, 주민의 불편을 아울러 검토해야 한다”고 우려 의견을 냈다. 고규창 행정안전부 차관도 “전문위원의 검토 의견을 고려해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의원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김민철 의원은 “그 인식이나 생각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며 “일반사업자나 정당을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이명수 의원도 “지금 홍보의 시대가 아닌가”라며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해 유권자가 알아야 한다”고 거들었다. 이에 고 차관은 “지방의 현실적인 요구와 주민들의 인식을 고려해야 한다”고 읍소했다.
하지만 여야의 합심 아래 개정안은 행안위에 이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었다. 이후 2022년 5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도 재석 227인 중 찬성 205인, 반대 9인, 기권 13인으로 압도적으로 가결됐다.
● 현수막 때문에 시민 안전사고
행안부는 개정안에 대해 △정당에 이미 일반 시민에 비해 더 많은 홍보 기회를 보장하고 있고 △정당 홍보물이 난립하면 국민 생활 환경이 나빠질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국회에 전달했다. 특히 행안위 전문위원은 시민의 안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당시 이에 대해 의원들은 “모든 정당들이 마구잡이로 현수막을 걸지 않을 텐데 왜 일어나지 않을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느냐”고 반박했지만 행안부의 우려는 곧장 현실이 됐다.
지난달 13일 오후 9시경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서 전동킥보드를 타던 대학생이 정당 현수막 끈에 걸려 목에 3cm가량의 찰과상을 입었다. 어두운 밤에는 현수막 끈이 잘 보이지 않다 보니 생긴 사고다.
같은 달 대구 달서구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가던 주민이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정당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바닥에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현수막이 거리 공해라는 민원이 빗발치고, 안전사고까지 발생하자 지자체들도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이달 9일 정당 현수막을 동마다 최대 1개만 걸도록 제한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13일 페이스북에서 “현수막은 정치 공해다. 도시 미관을 해치고, 소상공인 간판을 가려 영업을 방해하고, 시민 안전을 위협하고, 토양오염 대기오염을 일으킨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울산시, 대전시, 경남 창원시 등도 행안부에 관련 시행령을 개정해 달라고 건의하자 행안부는 14일 전국 17개 시도 옥외광고물 담당자와 간담회를 열고 관리 방안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나섰다.
● 여야 법 개정 나설 수 있을까
최근 유독 거친 문구의 현수막이 전국적으로 걸리고 있는 현상은 내년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이재명 대표를 겨냥해 ‘범죄조직 우두머리’라고 부른 현수막을 내걸면, 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을 ‘매국노’ ‘이완용’이라고 비판한 현수막으로 맞받는 식이다.
여당의 영남 지역 한 초선 의원은 “야당의 자극적인 문구 때문에 주민들이 불편해해서 현수막을 안 걸려고 했더니, 오히려 당원들이 ‘우리 당은 안 걸고 뭐하냐’고 항의를 했다. 우리로서도 대응 현수막을 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중진 의원은 “20년 동안 정치하면서 이런 수위는 처음 봤다”며 “여당은 당 대표를 공격하고, 우리는 대통령으로 맞불을 놓으면서 서로 점차 메시지가 더 과격해지는 양상”이라고 했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에 따르면 정당 현수막 제작 비용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1개당 5만∼10만 원 수준이다. 한 의원은 “우리 지역구에만 한 달에 300만∼400만 원 정도 현수막 예산이 내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양당 수입의 절반가량은 국민 세금이다.
생각보다 큰 정당 현수막에 대한 반발 여론에 정치권도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모양새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1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무차별 비방과 인신공격으로 가득 찬 현수막이 국민들에게 짜증과 고통을 유발하고 있다는 항의가 많다. 재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위성곤 정책수석부대표도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현수막을 전반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데 당내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발맞춰 국회 행안위도 법 시행 3개월 만에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행안위 여당 간사인 이만희 의원은 “정당 현수막 난립 문제에 대해 법률, 시행령 개정을 다 열어놓고 있다”며 “현수막 위치나 개수를 제한하는 쪽으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자극적인 문구가 담긴 상호 비방의 현수막은 결국 정치 불신과 혐오를 키운다”며 “위치나 개수를 제한하거나, 정당 스스로 꼭 필요한 현수막인지 또는 문구는 적절한지 고민하는 자정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정 후보 이름만 안 쓰면 ‘화천대유’ 가능… 고무줄 잣대
선거 때 정당 현수막 문구 어디까지 허용되나 2021년 금지한 ‘내로남불’ 현수막… 작년 대선에선 실명-사진 빼면 허가 헌재 “공정성 문제 없는 문구 허용”… 내년 총선서 표현의 자유 확대 전망
정당 현수막 문구는 대선과 총선 등 각종 선거 때마다 ‘고무줄 잣대’ 논란에 휩싸였다. 여야는 판단 권한을 가진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둘러싸고 매번 기 싸움을 이어왔다.
대표적 논란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선관위는 2021년 4·7 재·보궐선거에선 현수막 문구로 내로남불과 ‘무능’ ‘위선’ 등의 표현을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대선에선 이를 다시 허용하며 고무줄 잣대 논란에 불을 붙였다. 선관위 관계자는 “2021년에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떠올릴 수 있는 문구는 허가하지 않았다”면서 “대선 땐 표현의 자유를 위해 특정인의 실명이나 사진이 없는 한 현수막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애매한 기조에 맞추려다 보니 지난해 대선에선 특정 후보를 직접 거론하지 않되 관련 의혹을 지적하는 현수막이 길거리에 내걸렸다. 민주당은 당시 윤석열 후보를 겨냥해 ‘술과 주술에 빠진 대통령을 원하십니까’ ‘신천지 비호세력에 나라를 맡길 순 없습니다’ 등의 현수막을 걸었고, 국민의힘은 이재명 후보와 관련된 ‘법인카드로 산 초밥 10인분, 소고기는 누가 먹었나’ ‘쌍욕, 불륜 심판하자’ 등의 현수막으로 맞불을 놨다.
이처럼 특정 후보를 떠올리게 하는 문구는 허락됐지만, 후보 이름이나 사진이 들어간 경우는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선관위는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의 얼굴 사진을 넣은 ‘청와대를 굿당으로 만들 순 없습니다’는 현수막은 “배우자 사진을 쓰면 후보자가 특정돼 현행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해당 문구로만 현수막을 쓰는 것은 되지만 김 여사의 사진을 넣으면 안 된다는 것. 마찬가지로 ‘이재명 경기지사, 대장동 게이트 진상조사 촉구’라는 현수막도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실명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는 현수막 문구와 관련해 보다 폭 넓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선관위의 오락가락한 잣대의 근거가 된 공직선거법 90조 1항이 올해 7월까지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헌법재판소가 해당 조항에 대해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는 것이 명백하다고 볼 수 없는 정치적 표현까지 금지하고 있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결과다.
선관위는 지난해 10월 박찬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저희들의 법 운용 기준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는 것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한 데에 이어 올해 1월 공직선거법 90조 1항에 대한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당선이나 낙선 의도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범위에선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내로남불 등의 표현을 허용하자는 취지”라면서 “허위사실을 담은 현수막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처벌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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