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국회법’을 처리한 21대 국회가 오히려 이전 국회들보다 더 적게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의원의 기본 업무인 상임위원회 회의 횟수 자체가 줄어든 것.
24일 동아일보가 19대부터 21대까지 정부 부처를 소관하는 국회 12개 주요 상임위의 개의 이후 33개월간 회의 횟수를 전수 비교한 결과 19대 국회에서 1695번 열렸던 상임위 회의는 20대 국회에선 1439번, 21대 국회에선 1410번으로 줄었다. 21대 국회의 개의일부터 지난달 말까지 상임위 회의 횟수가 19대 국회 같은 기간에 비해 16.8% 감소한 것.
상임위별로 19대와 21대의 회의 횟수를 비교한 결과 외교통일위원회는 41.2%(136회→80회) 줄어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이어 국방위원회 37.8%(127회→79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32.4%(170회→115회) 순이었다. 12개 상임위 중 19, 20대 국회보다 21대 국회의 회의 수가 늘어난 곳은 행정안전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등 3곳에 그쳤다. 국회 관계자는 “국회의원이 일하러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의원 정수를 늘리자는 주장에 유권자들이 동의하겠느냐”라고 했다. 실제로 이날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 결과 현재 300명인 국회의원을 ‘늘려도 된다’는 응답은 9%에 불과했다.
정쟁에 바쁜 국회… ‘민생’ 다루는 기재위-복지위 회의 크게 줄어
일 안하는 국회
여야 이견에 회의 일정도 못잡아 상임위 12곳중 9곳 회의 감소 ‘일하는 국회법’ 사실상 효과없어
9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에는 보험사기방지특별법 등 ‘보험사기방지법’ 개정안 11건이 올라왔다. 21대 국회가 개회한 2020년 6월부터 이날까지 14건의 관련법이 발의됐지만 아직까지 한 건도 정무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흉악 보험사기 범죄를 가중 처벌하고 부당 보험금을 환수하는 내용 등을 담은 이 법은 여야 간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담당 상임위원회의 무관심 속에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것.
이에 대해 정무위 소속의 한 의원은 “지난해 예산안을 야당이 일방 처리하면서 생긴 여야 간 앙금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법안 처리 활성화를 위한 ‘일하는 국회법’까지 처리했던 국회가 막상 정치적 이유 등으로 과거보다 더 적게 일하고 있는 것.
● 12곳 중 9곳 상임위 회의 감소
실제로 동아일보가 분석한 결과 국회의원 업무의 핵심인 상임위원회가 회기를 거듭할수록 가동률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의원들은 각 상임위에서 법안을 놓고 토론을 해 다듬고 처리하며 소관 예산에 대해 심사하고 결산한다.
이처럼 입법부의 핵심 기능을 다루는 가장 기초적 단위인 상임위의 회의 횟수가 줄고 있다. 외교, 안보 등 국가의 핵심 정책을 관할하는 외교통일위원회, 국방위원회는 19대와 21대 국회를 비교한 결과 회의 횟수가 각각 41.2%, 37.8% 줄었다. 원자력발전, 정보통신기술(ICT) 등 국가 미래 산업을 총괄하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19대 때 170번 열렸지만 21대 들어서는 115번 개최(32.6% 감소)되는 데 그쳤다.
민생 법안을 다루는 상임위 회의 개최 횟수도 크게 줄었다. 국가 경제 정책의 컨트롤타워인 기획재정부를 소관으로 둔 기획재정위원회는 19대 179번에서 20대 156번, 21대 132번(19대보다 26.3% 감소)으로 갈수록 문을 연 횟수가 줄었다. 복지 법안을 다루는 보건복지위원회는 25.6%, 서민금융 문제 등을 다루는 정무위원회는 25.5% 회의가 줄었다. 조사 대상인 12개 상임위 중 19대 국회보다 21대 국회에서 더 많은 회의를 연 곳은 행정안전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등 세 곳에 불과했다. 행안위 국토위는 지역구 주민들의 관심이 큰 사안들을 다루고 있어 의원들이 좀 더 활발하게 회의를 연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관계자는 “외통위, 국방위의 경우 다선(多選) 혹은 각 당의 주요 당직을 맡고 있는 의원들이 배치되는 경향을 고려해도 회의가 너무 줄었다”며 “회기를 거듭할수록 회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일을 안 한다’란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여야 극한 대립에 회의 못 열어
여기에 해를 거듭할수록 여야의 대결이 심해지면서 통상 여야 간 합의로 열리는 상임위 개최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도 회의 수 감소의 배경으로 꼽힌다. 실제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달 중반까지 여야 간 이견으로 3월 회의 일정을 못 잡고 있었다. 이에 14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법사위원들은 “3월 국회 일정으로 법무부 현안 보고를 제안했으나 국민의힘이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법무부 현안 보고가 전제되지 않을 경우 의사 일정에 합의할 수 없다며 협상을 보이콧했다”고 맞섰다. ‘네 탓 공방’ 속에 결국 법사위는 21일에야 전체회의를 열고 법안 심사를 했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자기 당에는 유리하고 상대 당에는 불리한 이슈가 생겼을 때 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자연히 상대 당은 소극적으로 나오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과거보다 의원들이 지역구 활동에 더 신경 쓰는 것도 상임위 활동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열심히 상임위 활동을 하는 것보다 지역구 행사에 한 번이라도 더 참석하는 게 낫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 한 야당 의원은 “주말 지역구 활동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여야 의원 모두 금요일에는 상임위가 열리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갈수록 상임위 횟수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일하는 국회법’이 있지만 제재 수단이 없어 실효성이 없다”며 “정파적 이유로 합의가 어려워지고 있고, 상대에 대한 정치적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는 심리가 작용하면서 악순환이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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