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대통령실에서는 침묵 속에도 온갖 썰이 넘쳐납니다. 동아일보 대통령실팀 기자들이 함께 쓰는 디지털 코너 [용:썰]은 대통령실을 오가는 말의 팩트를 찾아 반 발짝 더 내디뎌 봅니다.
“한국 대통령도 ‘고독한 미식가’를 보다니. 조금 놀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도쿄 긴자의 경양식집에서 가진 2차 친교 자리에서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얘기를 꺼낸 사실이 알려진 뒤 원작자 마사유키 씨가 트위터로 내놓은 반응이다.
‘고독한 미식가’는 중년의 회사원이 식당에서 혼자 미식의 기쁨을 즐기는 드라마다. 말끔한 쥐색 양복에 서류 가방을 손에 든 중년의 ‘고로’ 씨는 혼자 마주한 소박한 밥상 앞에서 세상을 다 얻은 행복한 표정이 된다. 계란말이와 김치찌개 실력을 뽐낸 적 있는 윤 대통령이 좋아할 법한 콘텐츠다.
양 정상이 민감한 현안을 논의하기에 앞서 문화 콘텐츠 얘기로 마음을 풀어간 셈이다. 정상 간 셔틀 외교가 재개된 만큼 ‘고독한 미식가’ 외에도 한일 정상이 양국의 문화 콘텐츠를 놓고 대화를 나눌 일이 더 생길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가 “이 자리를 한국에서 이어 가자”고 했기 때문. 물론 한국의 강제징용 해법에 대해 일본이 향후 ‘합당한 호응 조치’를 내놓을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다.
● ‘신세계’ 박성웅 본 尹, “저분이 어떻게 여기에”
윤 대통령은 문화 콘텐츠 얘기도 종종 하는 편이라고 한다. 대통령 취임 후 공개 석상에서도 K콘텐츠를 즐기고 이를 토대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수출전략 회의에서 박성웅 씨가 드라마 해외 진출을 주제로 발표하자 “폭력배 연기를 굉장히 잘해 인상이 깊었는데 오늘 발표하는 것을 보니 말씀도 참 잘하시더라”고 했다. 박 씨도 영화 ‘신세계’의 대사를 빗대 “발표하기 좋은 날이네”라고 했다. 영화 신세계에서 자신이 맡았던 폭력조직 멤버 이중구의 대사인 “죽기 딱 좋은 날씨네”를 패러디한 것.
윤 대통령은 회의 참석자에 박 씨가 포함된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를 마친 후 윤 대통령이 “저분이 어떻게 왔지”라며 참모들에게 은근한 관심과 반가운 기색을 나타냈다고 한다. 검사 출신인 윤 대통령은 폭력 조직과 수사기관의 수 싸움을 다룬 콘텐츠를 즐기고, 극 중 ‘악역’이나 ‘신 스틸러’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보는 편으로 알려졌다.
김건희 여사도 문화 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지난달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문학 특별전 ‘이상, 염상섭, 현진건, 윤동주, 청와대를 거닐다’를 관람했다. 한국 근현대 문인의 이야기에 담긴 콘텐츠의 전망과 가능성에 주목한 것.
김 여사는 일본 순방에서는 일본의 민예 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조선 공예품 3000여 점 등이 전시된 일본 민예관을 찾았다. 지인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수년 전 백팩을 둘러메고 아내인 김 여사와 함께 일본 민예관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검찰 간부였던 윤 대통령이 휴가를 내고 이곳을 함께 방문해 도록과 자료를 수집하는 김 여사를 도왔다고 한다.
● K콘텐츠, 수출의 주력으로
“1961년에 한국의 10대 수출상품 리스트를 보면 ‘마른오징어’가 5위다. 60년 후인 2021년에 K콘텐츠인 ‘오징어 게임’이 대박을 터트렸다. ‘마른오징어’에서 ‘오징어 게임’까지 상전벽해다.”(정길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
바야흐로 K콘텐츠가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품으로 주목받는 상황. 윤 대통령은 지난달 수출전략 회의에서 “K콘텐츠를 패션·관광·식품·IT 등과 연계해서 고부가 가치화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4월 미국 국빈 방미에서도 K콘텐츠 등 한국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것도 주요 과제로 놓고 있다. 주요 콘텐츠 기업의 방미 동행도 일각에서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작 K콘텐츠 업계 표정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너나 할 것 없이 수출의 주력 상품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업계에선 ‘체력 고갈’의 위기감이 엿보인다. 경제 위기 속에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콘텐츠 업계가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의 영상 콘텐츠 제작비 세액공제율(대기업 3%, 중견기업 7%, 중소기업 10%)이 20%대에 이르는 미국보다 낮아 투자 여건이 어렵다는 것.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에 비견될 히트작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도 나온다.
● 尹 “지원하되 간섭 안 할 것”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 기조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다. 실제로 어떤 게 필요한지 현장에서 뛰는 분들의 말씀을 잘 살펴서 영화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일이 있다면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돕겠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배우 송강호와 박찬욱 감독의 칸 영화제 수상을 기념해 용산 대통령실에서 영화인들과 가진 만찬에서 이같이 말했다. 국정농단 특검 수사팀장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수사했던 윤 대통령의 발언이었던 만큼 문화계에선 주목을 받았다.
박 감독은 당시 “코로나로 극장 관람객이 급감하면서 영화 티켓 가격의 일부를 징수해 충당한 영화 발전기금이 고갈 직전에 다다랐다“며 지원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기재부(기획재정부) 장관이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고 답했다. 비단 영화계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밥상 속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는 고독한 미식가 고로처럼, K콘텐츠 수출의 밥상이 내실을 거두려면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체력이 떨어지면 승부 따위엔 관심도 없어지는 순간이 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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