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 기준을 낮추는 법안이 12일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예타 기준 완화에 따른 재정 부담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여야는 국가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유지하도록 하는 재정준칙의 처리는 미뤘다. 기획재정부는 “전 세계 105개국에 있는 재정준칙이 대한민국에 없다는 게 말이 되나”라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날 여야는 기재위 경제재정소위에서 ‘현재 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국비 지원 300억 원 이상’인 예타 기준을 ‘총사업비 1000억 원 이상·국비 지원 500억 원 이상’으로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재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의결했다. 예타 적용 대상 기준이 바뀌는 것은 예타 제도가 시행된 1999년 이후 24년 만이다.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처리된 만큼 이후 기재위 전체회의와 법사위, 본회의 통과도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이 본회의 문턱을 넘으면 바뀐 예타 기준은 내년도 예산안 추계 때부터 반영된다. 이에 따라 수백 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각종 SOC 사업이 당장 내년부터 남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21년 12월부터 예타가 진행 중인 충남 서산공항 건설은 총사업비 530억 원 규모로, 예타 기준이 완화되면 예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지금까지 “국가 정책적인 추진이 필요한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국무회의를 거쳐 예타 면제가 된 사례도 빈번했다. 예타 면제는 문재인 정부 때 120조1000억 원(149건), 이명박 정부 때 61조1000억 원(90건) 규모로 이뤄졌다.
반면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준칙 도입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당초 여야는 예타 대상 기준을 완화하면 “재정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재정준칙 도입도 함께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재정준칙 도입을 놓고 야당이 “복지예산이 줄어들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반대하자, 일단 예타 적용 대상 기준 완화만 먼저 처리한 것.
이에 대해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11일(현지 시간) 뉴욕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재정준칙 법제화가 국회에서 무산된 상황에 대해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는 전 세계 105개국에 재정준칙이 있는 걸 거론하며 “국회에서 저렇게 표류시키고 결론을 못 내주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재정준칙이 표류하는 동안 지난해까지 3년 연속으로 매년 100조 원 안팎의 나랏빚이 늘어났다. 지난해 국채, 차입금 등 정부가 직접적으로 상환 의무를 지고 있는 국가채무는 1067조7000억 원에 달한다.
여야가 재정준칙을 제쳐두고 예타 기준을 완화한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도 “내년 총선의 표심을 의식한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현실화 되면 내년도 예산안 편성 때부터 지역의 각종 숙원 사업 예산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여야가 국정 주도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내년 총선을 의식해 국가 재정의 안정적 관리는 뒷전”이라고 지적했다.
이상헌 기자 dapaper@donga.com 세종=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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