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졌던 의문입니다. 닫힌 섬과 같은 여의도만 보고선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시야를 넓혀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고 한국 정치와 신랄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때로는 우리 정치의 품격을 높일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젠간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K정치도 호평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공화당의) 거대한 붉은 물결을 예측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 직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백악관 회견장에 서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당초 선거 전문가들은 집권당의 무덤으로 불리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원 모두를 휩쓰는 ‘레드 웨이브(Red Wave)’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이 상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주지사 선거에서도 선전하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죠.
전문가 예측이 벗어난 배경에는 미국의 Z세대가 있었습니다. NBC방송 출구조사에 따르면 전국 18~29세 유권자의 3분의 2가 민주당에 투표했습니다. Z세대 유권자들이 ‘레드 웨이브’를 막아낸 것이죠. 미 LA타임스는 “중간선거에서 Z세대는 민주당이 거의 모든 격전지에서 승리하도록 도왔고, 상원에서 민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들이 2년 전에 했던 것처럼 역사적인 투표를 했다. (민주당이 추진 중인) 기후 위기, 총기 폭력, 개인의 권리와 자유, 학생 부채 탕감을 계속 다루는데 투표했다”고 Z세대 유권자를 콕 집어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반면 Z세대의 선택에 공화당은 좌절했습니다. 중간선거 승리를 바탕으로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탈환하려던 계획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마음을 돌릴 뚜렷한 해법이 없다는 점이죠. 20대 시절 트럼프 행정부 보좌관을 지낸 캐롤라인 레빗은 최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화당이 직면한 가장 거대한 도전은 우리 Z세대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국민의힘 3연승 이끈 ‘민지의 추억’
청년층이 보수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현상은 k정치에서도 오랫동안 나타났습니다. 역대 대선에서 대체로 2030 청년층은 민주당 계열, 6070 노년층은 보수당 계열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습니다.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51.6%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됐지만 20대와 30대에서는 3명 중 1명꼴인 33%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반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그 2배인 66%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2030세대의 59%는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34% 지지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상대적으로 2030세대에서 선전하면서 40% 초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전체 득표율보다는 6~8%포인트 부족한 수치였죠.
‘2030=민주당 지지’의 선거 공식이 확실히 깨진 것은 2021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때였습니다. 당시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는 57.5%의 득표율로 당선됐는데 20대(55.3%), 30대(56.5%)에서도 과반을 달성해 자신의 전체 득표와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보수정당에 드디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햇볕이 들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미 외교 전문지인 디플로매트(Diplomat)는 이를 두고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을 버렸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젠더 갈등 속에서 20대 남성들이 먼저 지지를 철회했고, 부동산 문제 등에 실망한 청년층 다수가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였다고 해석했습니다.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두 달 후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만 36세의 이준석 대표가 당선됐습니다. ‘이준석 현상’이라고 불렸던 이 대표의 돌풍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낸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직전 한길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에 따르면 20대 56.8%, 30대 51%가 이 대표를 지지한다고 했습니다. 정치권에서 주변부에 머물렀던 2030세대가 집단으로 이 대표에게 힘을 모아줬기에 여의도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표는 전당대회 과정에서 탄핵으로 물러난 박근혜 정권에 대해 사과했고, 국민의힘은 당을 괴롭혔던 ‘탄핵의 늪’에서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대선 기간에도 ‘AI 윤석열’, ‘59초 유튜브 공약’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선거운동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무성의하다”고 비판했던 더불어민주당도 결국 이 대표의 선거운동 방식을 모방했습니다. 민주당 선거 실무자들 사이에서 “이준석이 제일 무섭다” “왜 우리는 이준석 같은 사람이 없냐”는 말이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20대(45.5%)와 30대(48.1%)에서 자신의 전체 득표율(48.6%)과 비슷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한 달 뒤 이어진 6‧1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은 20대(46.3%)와 30대(49.6%)에서 고른 지지를 얻어 또 한 번 대승하며 ‘전국 선거 3연승’을 기록합니다.
● ‘민지’가 정부여당에 등을 돌린 이유
하지만 이같이 국민의힘을 비췄던 ‘민지(MZ)’ 햇볕이 사라지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국갤럽이 11일부터 13일까지 전국 성인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에 따르면 대통령이 직무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평가는 18~29세 14%, 30대 13%에 그쳤습니다. 반면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각각 63%, 81%에 달했습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대선에서 절반 가까이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민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윤 대통령 당선 후 친윤 일색으로 짜인 국민의힘은 ‘민지’가 시대교체의 상징으로 선출한 이 대표를 인위적으로 쫓아냈습니다. 정치권에 새바람을 일으키면서 전국 선거 3연승을 이끈 공로는 깡그리 무시됐습니다. 낡음이 새로움을, 복고가 트렌드를 이겼습니다.
물론 이 대표가 여성할당제 폐지, 페미니즘 논쟁으로 가뜩이나 분열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젠더갈등을 확대한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표와 식사 자리에서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당 대표 퇴출의 명분이 된 ‘성 상납 의혹’ 역시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는 논쟁하고, 수사할 사안이지 대선 승리 두 달만에 당 윤리위원회를 통해 군사작전하듯 대표를 내칠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단순히 이준석 개인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시대교체, 정치교체를 원했던 많은 ‘민지’와 결별했습니다.
이 대표가 물러나자 ‘김종인-이준석 대표 체제’에서 가려졌던 국민의힘 인적 자원의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과거 친이-친박이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새로운 얼굴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국민의힘의 한 당직자는 “사실 당이 이준석이라는 화장을 했던 것뿐이지 내부적으로 보면 국민의 외면을 받던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시절과 다른 게 없다”고 푸념했습니다.
이 대표 축출과 함께 시대교체의 실패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일도 있었습니다. 대선 기간에 윤 후보 측 청년보좌역 40명은 현안에 대한 의견과 각종 아이디어를 매일 두 장 분량의 보고서로 작성해 후보에게 보고했습니다. 윤 후보는 청년보좌역 의견을 대체로 바로 수용했습니다. 청년보좌역이 캠프의 실세라는 말이 나왔고, 의원실에서도 후보에게 건의 사항이 있을 때 청년보좌역을 통해 대신 전달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집권 후 부처마다 선발된 6급 청년보좌역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윤 대통령 주도하에 급하게 던지기만 할 뿐 성의 있게 설득하고 소통하는 노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청년보좌역에게 발언권이 있었다면 국민 설득 과정을 생략한 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해법을 발표하는 일도, ‘주 69시간 노동’ 같은 논란도 없었을 것입니다.
선거 과정에서 정권교체 주역으로 신나게 활동했던 청년들은 집권 후에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청년들은 보수정당에서 어렵게 되찾은 ‘정치 효능감’을 다시 빼앗겼습니다. 윤 후보는 대선 기간 “윤석열 정부에서 청년은 정책 시혜 대상이 아니라 국정 운영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 검사는 많이 보여도 청년은 보이지 않습니다.
● 천원 아침밥, 교통비 인하로 민지 돌아올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MZ세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청년층이 많이 이용하는 유튜브 ‘쇼츠’를 통해 윤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지난달 윤 대통령이 한국스카우트연맹 명예총재에 취임하자 보이스카우트 출신 최초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쇼츠로 제작했습니다. 1일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를 하기에 앞서 윤 대통령이 공을 던지며 몸을 푸는 모습도 담았죠.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대학생의 식비 부담을 덜어주는 1000원 아침밥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에는 당 지도부가 경희대를 찾아 학생들과 아침 식사를 했고, 정부는 곧바로 1000원 아침밥 지원 대상을 늘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청년층의 교통비와 통신비를 줄이는 대책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당 대표 직속 청년 정책기구를 만들고, 청년 대변인도 뽑았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민지’가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에 돌아온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것입니다. 이들이 현 집권 세력에 실망한 본질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책에서 영국 현 집권당이자 300년 동안 당명을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해 온 영국 보수당의 비결을 짚었습니다.
강 교수에 따르면 영국 보수당은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꾸준히 응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보수당은 기득권을 대표하는 정당이지만 교조적이고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포용적이고 개방적이었다”고 평했습니다.
16년간 재임했던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보수성향인 기민당을 이끌면서도 소속 정당의 정책적 노선과 다른 최저임금 도입, 근무시간 단축, 탈원전 등을 시행했습니다. 시민사회, 다른 정당과 소통하면서 지지 기반을 확장했습니다.
지난해 9월 그가 퇴임할 당시 지지율은 70%를 넘었습니다. 당적이 다른 사민당 소속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에게 퇴임증을 주면서 “새로운 형태의 고유한 지도력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모범을 보였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과연 지금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시대 변화에 발 맞추고 있는지,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당내 비판 세력에 대해 경고하고 인위적으로 이들을 배제하는 모습입니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홍준표 후보는 당심을 얻지 못해 패했지만 2030 세대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여론조사에서는 윤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앞섰습니다. 그랬던 홍준표 대구시장은 13일 당 상임고문 자리에서 해촉됐습니다. ‘전광훈 목사 손절’을 요구하면서 친윤 지도부와 대립했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도, 김 대표도 청년의 의견을 듣겠다고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친윤과 결을 달리했던 이준석, 유승민, 나경원, 홍준표를 내쳤던 그들 앞에서 어떤 청년이 당당하게 비판 의견을 말할 수 있을까요?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 내에서 민지의 열망은 여전히 넓은 사각 테이블의 구석 자리 어딘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청년 200여 명과 간담회를 갖고 “미래세대가 우리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면 국가가 망한 거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좀만 달리 말하면, 미래 세대가 희망을 버린 정부도 망한 정부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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