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렬 씨의 10대 시절은 배고픔과 탈북, 북송, 노동의 반복이었다. 20살 되던 2005년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학력은 북한에서 중학교 1학년 중퇴로 검정고시 기준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이었다. 한글도 새롭게 배워야 했고, 영어는 ABCD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랬던 그는 16년 뒤 미국에서 사회과학계열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탈북민이 됐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은 행정학 및 공공정치학 분야에서 미국 랭킹 1위로 꼽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맥스웰스쿨 박사 출신이다. 소년공 출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동문 박사가 되기까지 북한과 중국, 한국, 미국에서 걸어온 김 씨의 삶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 북한-소년 밀가루 장사
김 씨는 1985년 북한의 북방 도시 청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는 바람에 상점판매원인 어머니와 2살 터울 누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던 동네는 청진에서도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는 나남 구역이었다.
청진은 1990년대 초반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배고픈 기억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10살 되던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어머니는 식료품상점 판매원이었지만, 상점에는 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하나밖에 없던 재산인 TV를 팔고, 그 돈을 밑천 삼아 밀가루 장사를 시작했다. 청진의 유명 장마당인 수남장마당에 가서 화교나 외화벌이 업체가 중국에서 들여온 밀가루를 도매가격으로 넘겨받아 나남장마당에서 팔았다.
어린 성렬이도 어머니의 장사를 열심히 도왔다. 그렇게 살았지만, 하루 세끼 다 챙겨먹기는 너무 힘들었다. 풀을 넣고 끓이다가 국수를 넣은 뒤 푹 삶아 죽처럼 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풀국수죽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밀가루 장사도 2년이 지나선 어렵게 됐다. 외화벌이 업체들이 직접 나남장마당까지 와서 밀가루를 팔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그와 누나를 앉혀놓고 중국으로 가자고 했다. 마침 어머니의 먼 친척들이 중국에 살고 있었다.
성렬이는 중국이 어딘지도 몰랐다. 다만 그곳에 가면 허기진 배를 채을 수 있다는 말만 기억에 남았다. 어린 그에겐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다 남은 돈 3000원을 들고 탈북 길에 올랐다. 당시 쌀 50㎏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 돈에 가족 세 명의 운명을 맡겼다. 그렇게 이들은 1997년 3월 국경 옆 무산에 와서 경비대원에게 돈을 주고 강을 넘었다.
두만강은 3월이면 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얼음장이 깨져 목까지 차는 물에서 허우적대던 일, 떠내려가는 아들과 딸을 꽉 부둥켜안은 어머니가 강물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일, 강을 넘었을 때 어머니의 온 몸이 얼음장에 긁혀 피투성이가 됐던 일, 맞은 편 중국 땅에 도착했을 때 옷이 금방 얼어붙던 일. 그 모든 기억들을 그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중국-15세 소년공
성렬의 가족은 연길에 있는 친척집에 연락해 그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어린 성렬에게 중국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TV였다. 이렇게 많은 채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물론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어 더 좋았다.
연길은 북중 국경 옆 도시인지라 검문검색이 심했다. 이들은 헤이룽장(黑龙江)성에 사는 다른 친척들을 찾아 떠났다. 친척들은 북한에서 건너온 성렬이 가족을 놓고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도와주기로 결론을 냈다. 우선 이들에게 가짜 호적이라도 만들어주고, 두 번째는 성렬의 모친을 재혼시키기로 했다.
1998년 성렬은 한족 남성과 재혼한 엄마를 따라 내륙의 허베이(河北)성으로 이사 갔다. 가짜 호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족학교에 들어가 1년 정도 다녔지만, 중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그가 또래들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 적응을 못한 그는 15살에 집을 나와 안테나를 만드는 어느 공장에 취직해 기숙사에서 살았다. 누나 역시 근처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렇지만 소년공 생활도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기숙사에 공안들이 찾아오더니 그를 잡아 공안국으로 끌고 갔다. 가보니 어머니와 누나도 이미 잡혀와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와 살던 한족이 그들이 탈북자라고 공안에 고발했던 것이다. 이들은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북송됐다. 보위부에선 이들에게 한국행을 시도했는지, 교회에 갔는지, 탈북 동기는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15세 미성년자인 성렬은 그리 심하게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마침 2000년 6·15 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기 배고파서 도강한 사람은 용서해주라”는 지시도 내렸다. 성렬의 가족은 보위부에서 한 달, 강제노동을 하는 집결소에서 석 달을 고생하고 석방됐다.
3년 만에 원래 살던 집으로 가보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갈 곳은 외삼촌 집밖에 없는데, 다 같이 먹고 살기 어려운 와중에 세 식구가 함께 얹혀살 수는 없었다. 성렬은 어머니에게 혼자라도 중국에 다시 가겠다고 말했다. 2년 뒤면 군대에 입대해야 하는데, 중국의 풍족한 삶을 경험한 그는 허약환자들이 속출하는 군에 끌려가긴 싫었다.
그는 집을 나와 신의주 집결소에서 알게 된 무산 형님을 찾아갔고, 그와 함께 2000년 8월 다시 탈북했다. 중국에 와서도 갑자기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일하던 안테나 공장에 다시 찾아갔다. 그 사장은 그가 탈북자인 것을 알고서도 기숙사에 머물게 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공장에서 두 달쯤 일을 했을 때 어머니와 누나도 그의 뒤를 따라 탈북해 연길에 왔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베이징의 어느 민박에서 식모 일자리를 얻었다. 누나도 텐진(天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성렬은 2001년 어머니가 알게 된 조선족 전도사가 텐진에서 운영하던 국수공장으로 옮겨갔다.
중국에 다시 나왔지만 온 가족은 함께 살 수가 없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이들은 중국에서 전화로 그리움을 나누면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성렬은 국수공장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연락이 왔다. 민박집에서 한국으로 탈북자들을 보내주는 브로커를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에 가면 네가 공부를 할 수 있대.”
성렬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또래 애들이 학교를 다닐 때 그는 기숙사에 숨어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빴다. 북송되지 않은 것만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할 수 있다니.
그는 전도사를 찾아가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브로커 비용 3000위안만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그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오는 일행과 함께 몽골 사막을 넘어 2004년 9월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들이 무사히 한국에 가자 뒤따라 어머니와 누나도 몇 달씩 사이를 두고 한국에 왔다.
● 한국-꿈을 향해 달리다
성렬은 하나원을 거쳐 2005년 1월 말 마침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받게 됐다. 그의 나이 20세. 아직은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겐 오직 하나의 목표밖에 없었다.
“이제 발편잠을 잘 수 있는 곳에 왔으니 이제부터 오직 공부만 열심히 해보자.”
하지만 그는 북한에서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까지 과정에 불과한 인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영어는 알파벳도 몰랐고, 한글과 수학은 다시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나 간절히 대학에 가고 싶었다.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천안하늘꿈학교’에 입학한 그는 초중고 검정고시를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1년 남짓한 기간에 모두 통과해 2007년 한동대 국제어문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검정고시와는 또 달랐다. 아무리 열심히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고 해도 대학에서 배우는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특히 한동대는 미국 교수가 직접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영어로 대화하는 과목이 많았다. 교재도 영어 원서 그대로 사용했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아 1년 동안 최선을 다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는 1년 만에 휴학을 했다. 아무래도 공부는 아닌가 싶을 때도 많았고, 남들처럼 회사에 취직해 돈을 벌고 싶은 유혹도 늘 따라다녔다. 그때마다 그는 북한과 중국을 떠올렸다.
“이 좋은 나라에 와서도 주저앉으면 나는 인생을 포기한 것이 된다. 공부에 맺혔던 한을 무조건 풀고야 말겠다.”
휴학 기간 그는 학원에서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복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는 현지에 가서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기독교 단체들의 도움으로 그는 1년 8개월 동안 미국에 갈 수 있었고, 영어에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그는 7년 만인 2015년에야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1년 늦게 동생을 따라 한동대에 입학한 누나는 그보다 1년 빠른 2014년에 졸업했다. 누나는 대학 졸업 이후 캐나다로 유학을 가 현지에서 석사를 딴 뒤 지금은 영주권을 받아 캐나다 정부 공무원으로 취직해 살고 있다.
셩렬의 꿈은 대학 졸업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박사 학위로 세웠다. 박사도 한국에서가 아니라 최강대국인 미국에 가서 받고 싶었다. 강대국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소도시에 공부하러 왔을 때 느낌도 좋았다. 나무로 둘러싸인 목재 주택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온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 졸업장을 받고 나서 유학길을 찾았지만 미국으로 가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여러 영어권 국가 대학에도 지원서를 냈는데 스코틀랜드의 한 대학이 그에게 석사 입학 허가를 내주었다. 이제부터는 유학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겐 우연히 기회도 찾아오는 법이다. 탈북대학생들을 지원하던 사단복지법인 ‘따뜻한동행’이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따뜻한동행 이사장을 겸하고 있는 한미글로벌 김종훈 회장은 늦깎이 공부를 시작해 열심히 노력하는 그를 지켜보다가 초기 유학에 드는 비용 일부를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유학은 결국 비자 문제가 잘 해결이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그는 김 회장에게 찾아가 유학비를 돌려줬다. 김 씨의 성실함과 정직에 감동한 김 회장은 나중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다시 지원해줬다.
유학길은 막혔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국내 대학원에도 열심히 지원서를 넣었다. 마침내 2016년 연세대 대학원 통일학 협동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대학원을 다니던 중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외국인의 미국 대학원 유학을 지원하는 미국 정부 장학금인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2018년부터 탈북민도 대학원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성렬은 이 프로그램에 선정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했고 마침내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 1기로 선정한 탈북민 장학생 5명 중 한 명이 됐다. 드디어 꿈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공부도 신이 났다. 그는 보통 5학기 과정이 필요한 석사 학위를 4학기 만에 끝내고 2018년 1월 미국으로 떠났다.
● 미국-꿈을 이루다
미국에 도착한 성렬은 프로그램이 지원하는 6개월의 선행 어학연수 기간에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평소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성렬은 맥스웰스쿨이 관련 분야에서 미국 대학원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을 알고 지원서를 넣었는데 합격이 된 것이다.
2018년 가을부터 그는 죽으라고 공부만 했다. 그 결과 2020년 5월 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방학 때 한국에 잠깐 왔는데 미국에서 코로나가 대유행을 하는 바람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기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고용노동부 소속 코로나 재난 지원금 지원팀에서 2개월 동안 방역 관련 알바도 했다.
이때 학교에서 종합시험과 논문 제안서를 내라는 연락이 왔다. 논문 예비 심사에는 3명의 교수가 필요했다. 그는 대학원 코스워크를 수강했던 교수들에게 열심히 이메일을 보냈다. 처음 이메일을 보낸 교수 10명은 모두 거절했다. 그가 논문 주제로 삼고 싶었던 북미관계는 자신들이 모르기 때문에 심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른 교수를 찾고 이메일과 전화로 설득했다. 마침내 한국의 동학운동을 연구했던 교수와 중국을 연구했던 교수가 그의 논문을 봐주겠다고 허락했다.
화상으로 오후 7시에 시작한 예비 논문 심사는 새벽 1시가 넘어 끝났다. 성렬은 이때가 살면서 몇 안 되는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교수들은 마침내 조건부로 논문 허가를 내주었다.
2020년 11월부터 성렬은 논문을 쓰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도서관에 들어박혀 논문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논문 초고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 점검에서 다시 지적을 엄청 받고 대폭 수정을 해야 했다. 학위에 대한 미국의 심사는 정말 까다로웠고, 대충 넘어가는 법이 절대 없었다.
그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논문을 완성시켜 나갔다. 10월에 드디어 최종심사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도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와 화상으로 4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교수들은 “한국과 미국의 시각에 많이 편중된 것 같으니 중국과 일본 시각도 넣으라, 중국어와 일본어 논문도 찾아서 넣으라”는 등 주문을 다시 내렸다. 다시 수정을 거듭한 끝에 그는 마침내 ‘동아시아 국제정치변화가 북한의 대미정책에 미친 요인’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2021년 12월 22일은 그에게 절대 잊지 못할 날이었다. 맥스웰스쿨에서 박사 학위 증서를 받았던 것이다.
2005년 20살에 한국에 도착해 16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미국 박사 학위까지 수여받게 된 것이다. 영어 철자부터 배우며 시작해 마침내 36세에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흐르며 눈물이 절로 났다.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이 배출한 탈북민 1호 박사가 됐다. 동시에 사회과학 분야에서 미국 박사 학위를 받은 1호 탈북민이기도 하다. 미국 대학에서 탈북민이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2016년 미국 남부 텍사스 A&M 대학원에서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셉 한 씨가 있다.
● 성렬의 꿈
성렬은 태어나서 북한에서 12년, 중국에서 7년, 한국에서 14년, 미국에서 4년을 살았다.
북한은 태어난 고향이고 언젠가 돌아가야 할 땅이지만, 고통의 추억이 너무 컸던 곳이었다. 중국은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그곳에서 공안의 단속을 피해 다니며 소년공으로 사는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성렬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인천공항에 내려 차를 타고 오며 도로가 너무 밝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밝지만 않았다. 그는 정착 성공 여부를 대학을 포기하느냐 마냐에 두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정착에 성공한 셈이다.
미국은 처음 갔을 때는 너무나 평온한 느낌을 받았지만, 살다보니 그 땅도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아카데미 영역에선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성렬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순간으로 풀브라이트 장학생에 선정돼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던 때를 꼽았다. 두 번째 기억이 남는 순간은 지난해 학술지에 자신의 영문 논문이 실렸을 때였다. 최근에도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등 연구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얼음장을 헤치며 탈북하던 때나 북송돼 감옥에 있을 때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그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그런 태도가 지금까지 그를 달려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36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그리 늦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지금이 인생 1막을 마치고 2막을 시작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학위를 받고 계속해서 연구직, 또는 대학교 강사 등의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들어가 남북한과 국제관계 관련해 계속해서 연구를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특히 최근 남북한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면서 이 분야를 연구하면서 살 수 있는 자리는 급격히 사라졌다. 그래서 성렬은 박사 학위를 받고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연구 용역과 학술지 논문을 쓰며 취직 준비를 하고 있다. 최종 목표는 연구기관 연구원 또는 대학교 교수를 꿈꾸고 있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그래도 그는 비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어려운 삶을 잘 살아왔기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헤쳐갈 수 있다는 신심에 가득 차 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닫혀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지금까지 증명했다. 그는 이미 삶의 종착지도 멀리 내다보고 있다.
“저는 통일이 되면 고향 청진에 돌아가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습니다. 북한에는 인재들이 많아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교육의 빈부격차가 심한 북한에서 저는 누구보다 공부에 한이 맺혔던 사람입니다. 결국 인재 양성이 나중에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고 나중에 북한에서 많은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는 대학교를 설립할 것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