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01건. 국민의힘이 지난달 10일 ‘김기현 체제’가 출범한 뒤 23일까지 발표한 당 공식 논평 중 ‘이재명’이 포함된 논평의 숫자다. 휴일을 포함한 45일 동안 하루 평균 6.7건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관련 논평을 낸 것. 당연히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라 이 대표를 성토하는 내용이 담긴 논평들이다.
이런 기류는 새 지도부가 출범한 뒤 첫 최고위원회가 열린 3월 13일부터 감지됐다. “이 대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와 조폭의 그림자, 마치 영화 ‘아수라’처럼 등골이 오싹하고 섬뜩하다”는 김기현 대표의 발언을 시작으로 김재원 김병민 조수진 최고위원과 장예찬 청년최고위원 등 전당대회 당선인들은 처음으로 참석한 최고위 공개 발언에서 이 대표를 맹비난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을 연일 비판하는 상황에서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기-승-전-이재명’이라는 흐름으로 매일같이 이 대표를 성토하고 있다. 공세의 수위와 집요함을 보면 국민의힘은 이 대표가 대표직에서 사퇴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정말 그럴까.
● 국민의힘 “이재명 사퇴 안 할 거 알지만…”
“같은 당 의원들의 사퇴 요구에 꿈쩍도 안 하는데, 우리가 이야기한들 (사퇴를) 하겠느냐.” 국민의힘의 한 의원은 ‘정말 이 대표의 퇴진을 바라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논평을 발표하는 당 대변인단은 물론이고 여당 의원들도 입버릇처럼 이 대표의 사퇴를 말하고 있지만, 현실화되지 않을 걸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왜 국민의힘은 이 대표의 사퇴를 목 놓아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한 여권 인사의 설명. “우리도 야당 해봤지만, 야당은 매일같이 장관과 대통령 참모들에 대해 ‘물러나라’, ‘사퇴하라’고 외치는 게 일이다. 물론 그렇게 외쳐도 안 물러날 거 안다. 하지만 유권자들에게 ‘문제적 장관’, ‘귀 닫은 집권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야당은 매일같이 외치는 거다. 이 대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대표가 버티고 있습니다’라는 걸 유권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여권에 대한 여론이 안 좋은 거 알고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민주당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다. 대선 이후에도 여전히 이 대표가 민주당의 간판으로 활동하고 있고, 자연히 이 대표 사법리스크는 계속 수면 위에 떠 있다. 민주당은 우리에게 ‘친윤(친윤석열) 일색’이라고 하는데 그럼 뭐 민주당은 대선 지고 나서 바뀐 게 있나? 여전히 ‘친명(친이재명) 체제’ 아니냐. 지난해 대선에 이어 내년 총선도 ‘윤석열 대 이재명’의 구도가 된다면 우리에겐 결코 나쁘지 않다. 그럼 우린 이 대표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문제점만 계속 지적하면 되는 거다. ”
● 여야의 ‘누가 더 못하나’ 경쟁
이런 여권의 기류와 기대는 14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동안 여실히 드러났다. 14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27%를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3주차 이후 25주 만에 다시 최저치를 기록한 것. 정당 지지율 역시 민주당 36%, 국민의힘 31%를 기록하며 격차가 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국민의힘 최고위원들의 연이은 논란 등이 고스란히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 이 결과에 대통령실은 “항상 민심에 대해 겸허하게 보고 있다”고 했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당장 1년 앞으로 다가온 내년 총선을 치러야 하는 의원들도 술렁이기 시작한 것. “당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우려도 커졌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선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핵심은 “민주당의 ‘돈봉투 의혹’이 이번 조사에 제대로 반영이 안 된 것 같으니 지켜보자”는 것. 당시에는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돈봉투 의혹’이 막 불거진 참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21일, 한국갤럽의 4월 3주차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31%로 반등했다. 5% 포인트까지 벌어졌던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32%로 같아졌다. 민주당 관계자는 “‘돈봉투 의혹’에 대한 관심은 커졌는데 당 지도부나 송영길 전 대표 등이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한 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 “서로에게 힘이 되는 국민의힘-민주당”
이처럼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번갈아 자책골을 기록하며 서로의 지지율을 다시 하향 평준화하는 상황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두 당이 나란히 상대방만 믿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사실상 거대 양당 체제가 고착화된 국회 현실을 이용해 ‘누가 더 못하나’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 그렇다고 여야가 매번 이런 양상만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대선을 앞뒀던 2021년 여야의 모습은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다.
2021년 6월 전당대회에서 국민의힘은 ‘30대·0선 당 대표’를 뽑는 파격을 선보였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확실한 변화를 선보여 지긋지긋한 전국 선거 연패를 끊어내고 정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의도였다. 민주당 역시 2021년 6월 국민권익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된 12명의 의원들에게 탈당을 권유하는 초강수를 둔다. 또 무기명 의원 투표를 통해 문재인 정부 부동산 대책 방향과 다르게 종합부동산세(종부세) 부과 대상을 줄이는 방안을 채택한다. 4·7 재·보궐선거 참패로 인해 “이대로라면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야 모두에게 절박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쇄신 경쟁은커녕 “그래도 저쪽보다 우리가 좀 더 낫다”는 자기 합리화에만 빠져 있다. 이런 여야를 유권자들이 외면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21일 한국갤럽 조사에서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무당층은 3·9대선 이후 최고치인 31%까지 늘어났다. 언제쯤 여야의 무책임한 현실 안주 경쟁이 끝이 날지, 유권자들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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