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졌던 의문입니다. 닫힌 섬과 같은 여의도만 보고선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시야를 넓혀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고 한국 정치와 신랄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때로는 우리 정치의 품격을 높일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젠간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K정치도 호평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요즘 국제 뉴스에서 화제의 인물은 단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입니다. 그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시민사회와 노동계가 여러 차례 총파업에 나섰음에도 연금 수령 시기를 2년 늦추는 연금 개혁법을 지난달 통과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의회에서 야당이 강하게 반대하자 헌법 조항을 활용해 의회 표결을 생략한 채 입법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는 광장에서 냄비를 두드리며 항의하는 시위대를 직접 찾아가 “분노는 표출돼야 하지만 냄비를 두드리는 것이 프랑스를 전진하게 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프랑스 언론과의 생방송 인터뷰에서는 한술 더 떠서 “연금 개혁으로 떨어진 지지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며 “단기적인 여론조사 결과와 국가의 이익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제3지대 정치인입니다. 좌파 성향의 사회당 정부에서 장관직을 역임했지만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등 중도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스스로를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면서 청년과 함께 사회운동단체 ‘앙 마르슈’를 이끌고 정치 세력화에 성공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좌우 한쪽 진영이 아닌 중도파 유권자의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념‧지역‧조직을 떠나 국가적 의제에 자신의 정치적 승부수를 걸 때가 많습니다. 그는 연금 개혁법을 공포한 지 3일만인 17일(현지 시각) 대국민 연설을 통해 노동, 경찰, 의료 개혁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마크롱은 제3지대 정치의 장단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프랑스는 연금 개혁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 실패로 국가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20%대입니다. 지금도 냄비와 프라이팬을 들고 시민들이 전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죠. 연금 개혁으로 프랑스는 2030년 135억유로(약 2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던 연금 적자를 크게 줄일 수 있게 됐습니다. 그가 집권 초 추진한 노동 개혁의 성과로 9년 전에 비해 실업률은 3%포인트 줄고, 고용률은 3.7%포인트 올라갔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여야 모두 싫다”… 제3지대 기반 열리나
지난해 3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맞붙은 대선은 민주화 이래 최악의 대선이자 역대급 네거티브 선거로 꼽힙니다. 두 후보 모두 60%가 넘는 비호감도를 기록하면서 다수의 청년과 중도층 유권자는 지지할 후보를 찾지 못해 방황했습니다.
오죽하면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선거가 추문과 말다툼, 모욕으로 얼룩지고 있다”면서 “다가오는 대선은 ‘비호감 선거’라고 불릴 만큼 역대 최악에 도달한 상태”라고 꼬집었을까요.
총선을 약 1년 앞둔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친윤(친윤석열) 사당화’의 길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는 국민의힘은 지도부의 연이은 설화와 전광훈 목사를 둘러싼 내홍으로 비판받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에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까지 떠안고 있는 상태입니다.
거대 양당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습니다. 한국갤럽이 18~20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오차범위 95% 신뢰수준에서 ±3.1%p, 이하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무당층은 31%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율 각각 32%와 맞먹는 수치입니다.
유권자의 열망이 커지면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은 움직이는 법입니다. 최근 금태섭 전 의원이 ‘수도권 중심 30석 정당’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세력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정치권의 ‘킹메이커’로 꼽히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조력 의사를 밝히면서 불씨를 지피고 있습니다.
●벚꽃처럼 사라진 제3지대 추억
거대 양당에 실망한 유권자를 흡수하기 위해 그간 수많은 제3정당이 탄생했습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 ‘3김(金)’ 중 한 사람인 김종필 총재의 자유민주연합,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로 인기가 높았던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21 등 사회적 명성이 높은 인물들이 제3지대에서 대선에 출마하거나 정당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V3 백신을 무료 배포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던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이 있었습니다. 국민의당은 2016년 총선 비례대표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고, 호남 지역을 휩쓰는 돌풍을 일으키면서 38석으로 원내 3당의 지위를 차지합니다. 20대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으로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고, 국민의당은 법안 처리 결정권을 쥐게 됐습니다.
그 효과는 곧장 나타났습니다. 양당 협상이 아닌 3당 협상이 진행되자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을 결정하는 원구성 협상이 빨라졌습니다. 추가경정예산안(추경) 편성에서도 국민의당 주도로 합의안이 만들어졌습니다. 거대 양당이 대립하며 교착 상태에 빠져들 때 합리적 중재자가 등장하면서 타협의 정치가 이뤄진 것입니다.
당시 국민의당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추경 심사를 앞두고는 국민의당 정책위의장을 맡았던 김성식 의원 사무실에는 ‘콧대 높은’ 기획재정부 고위 공무원들이 줄기차게 드나들며 읍소 작전을 벌였습니다.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이 동의하지 않으면 추경 통과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국민의당은 안철수 대표 측근, 호남 출신, 정책전문가 그룹 등 다양한 세력이 한 집에 모여 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내에서도 이견 조율이 쉽지 않았습니다. 토론이 많아지면서 의원총회는 길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출입기자들도 쟁점이 있을 때마다 의원 한명 한명의 표결 성향을 분석하는 수작업을 했습니다. 지도부가 당론을 정하면 의원들은 거수기 역할을 하는 기존 거대 양당에서 경험하지 못한 문화였죠.
국민의당에 있다가 국민의힘으로 당적을 옮긴 한 전직 의원은 “국민의당은 작은 당이라 내 의견이 쉽게 반영됐고, 당장 변화를 이끌 수 있었다”며 “국민의힘에서는 뭘 하려고 해도 기존의 시스템이 있다 보니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당은 점차 당내 정쟁에만 매몰됐고, 정치적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기성 양당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7년 대선에서는 안철수 후보가 한 때 지지율 1위를 기록하는 등 돌풍을 일으켰으나 ‘MB 아바타’ ‘갑철수’ 논란 등 아마추어 선거 운동과 거대 양당의 물량 공세 앞에 힘을 쓰지 못하고 3위로 추락했습니다.
대선 패배 후 당이 혼란에 빠지자 국회 내 중재자 역할도 사라졌습니다. 결국 20대 국회는 역대 최악의 법안 처리율을 기록하면서 또다시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을 들은 막을 내렸습니다. 정치적 지향점을 잃어버린 국민의당은 둘로 쪼개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극한의 진영 대립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이 정치 교체를 원해 어렵게 다당제 구도를 만들어줬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난 것이죠.
●200년간 제3정당 실패한 美… 한국은 더 악조건이지만
미국 정치는 여러모로 K정치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양당제의 전통이 굳건하지만 국민이 꼭 양당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미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민주‧공화 양당이 형편없이 일해서 제3의 정당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56%에 달했습니다.
지난해 말 미국에서는 민주당, 공화당 일부 인사를 중심으로 ‘전진당’(Forward Party)이라는 중도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전진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점에 대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앞으로’(Not left. Not right. Forward)라고 소개했습니다.
전진당은 일부 사회운동 단체들과의 통합으로 당세를 늘리고 있지만 정치적 반향은 크지 않습니다. 당장 내년 11월 열리는 대선에 후보도 내지 못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다른 제3정당인 자유당, 녹색당도 비슷한 형편입니다. 200여년의 미국 정치 역사에서 200여개의 제3정당이 만들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승자독식 선거 제도, 소선거구제, 선거자금 모금의 불리함 등이 제3정당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K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조건입니다. 여기에 한국은 양당의 지역적 기반이 미국보다도 확고한 편입니다. 언론 환경도 녹록지 않습니다. 국회에 출입하는 기자들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으로 각각 흩어져 있어 제3정당은 유력 대선주자가 있는 게 아니면 웬만해서는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제3정당이 성공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다음 총선에서 제3정당의 성공 가능성을 묻는다면 매우 낮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3정당 등장 소식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내가 잘하기보다는 상대가 못해서 반사이익을 얻는 걸 당연시하는 거대 양당을 심판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현아 (전) 의원은 어떻게 돼가고 있냐”, “박순자 (전) 의원 수사는 어떻게 돼갑니까. 관심이 없으신가 보다”라고 되물었습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와 관련해 두 전직 국민의힘 의원을 언급하면서 물타기와 ‘프레임 전쟁’에 나선 것이죠.
윤석열 대통령은 또 어떻습니까. 윤 대통령은 정권 출범 직후 논문표절·음주운전 등으로 논란을 빚은 박순애 전 교육부 장관에 대해 “전 정권 인사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나”라고 했습니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니자 “수년간 군의 대비 태세가 부족했다”고 또 한 번 지난 정부 탓을 했습니다.
두 거대 양당은 선거제도 개편을 내팽개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온몸으로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대 양당이 이른바 ‘똥볼 경쟁’을 할수록 유권자의 정치 교체 요구는 들끓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폭발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국민은 정치 입문 1년도 안 된 윤석열 검사를 대통령으로 뽑을 정도로 역동적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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