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7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한 것은 3월 정상회담 발언보다는 한 걸음 진전된 발언으로 평가된다. 당시 기시다 총리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내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점을 확인한다”고만 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한일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선 이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 “내 생각 솔직하게 이야기” 개인적 유감
기시다 총리는 이날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개인 차원에서 피해자들의 과거 고통스럽고 슬픈 경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두 차례 밝혔다. 과거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왕세자 시절인 201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70주년 당시 2월 생일 기자회견에서 “앞선 전쟁에서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귀중한 목숨을 잃고 많은 분들이 고통스럽고(苦しい) 매우 슬픈(悲しい) 일을 겪은 것에 대해 매우 아프게(痛む) 생각한다”고 한 표현과 동일하다.
다만 기시다 총리는 ‘마음이 아프다’는 발언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하는 말로 명확히 이해해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이라고 했다. 개인 입장을 전제로 강제징용 피해자가 겪은 고통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는 의미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죄는 이날도 나오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많은 분들이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어 주신 것에 가슴이 찡했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피해자 15명 가운데 10명이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해법으로 내놓은 3자 변제안을 수용해 유족 변제금을 수령한 사실 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기시다 총리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온 선인들의 노력을 계승하고 미래를 위해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과의 협력이 총리로서 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 “日 정부·당 만류”…일부 유족 “진전 기대”
일본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과 자민당은 이번 정상회담에 앞서 기시다 총리에게 방한 전 “후속세대에 짐을 물려주게 된다”며 “절대 사죄와 반성 입장을 표명해선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일본 외무성과 총리 관저가 준비한 회의 및 회견 자료에도 이번 발언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실도 사죄와 관련된 내용은 한일 간 조율된 의제가 아니었다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한국이 먼저 (과거사) 얘기를 요구한 바가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줘 감사하다”는 반응을 드러냈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은 “양국이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기시다 총리가 직접 한국 국민들에게 본인 입장을 진솔하게 설명했다는 건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갖고 사죄의 마음을 전하겠다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김규수 할아버지의 아들 김인석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일본이 기본 노선을 바꾸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정도가 최대치였을 것”이라고 했다. 히로시마 미쓰비시 피해자 이병목 할아버지의 아들 이규매 씨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셔틀외교로 자꾸 만나다 보면 사죄 입장에도 진전이 있을 거라는 조그만 희망을 가져본다”고 전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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